허구 속에서 드러난 모두에게
허구 속에서 드러난 모두에게
1부 첨탑
1~74
1.
나의 기억은 흐물거린다. 통조림의 질감. 문제는 방부 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해명하기 위해선 일단 기억을 통 속에서 꺼내야 한다. ‘그것’이 도처에 쏟아지더라도. 차라리 내가 넝마였으면 좋겠다. 시간에 의해 닳거나 헤진 결과로서. (나는 잉크젯 프린트로 만든 ‘유사 회화’를 연상하고 있다.) 어떤 자국은 명료할 것이다. 다른 자국은 좀 더 희박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국들을 비교하다 보면 넝마에 중첩된, 흐물거리지 않는 시간의 레이어가 드러날지도. 넝마는 층들 사이의 선후 관계를 통해 마침내 하나의 이미지로 식별되고 ‘그것’은 진열된다. 분주한 대로에 늘어선 쇼윈도에. 혹은 쇼윈도를 자처하는 전시장에.
결국 나는 다시 전시장으로 되돌아온다. 미술을 위해, 때로는 미술에 선행하는 거점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오프닝이나 파티를 위한 자리는 아니다.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은 없다. 플라스틱이나 유리로 빗은 와인잔도. 자동 재생되는 믹스 셋도. 사실 아무것도. 바로 거기에 나의 기억을 엎지른다. 주변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냥 무슨 퍼포먼스려니. 질척이는 바닥을 닦지 않고 무언가를 암송한다. 암송하는 척한다. 나를 식별하기 위해서. 허공에 매달린 고래 모양의 풍선. 그 작업을 만든 사람이 누구였지? 암송을 내내 기록한 일지들의 저자는? 답을 주저하게 된다. 그걸 발설하는 순간 암송은 끝나므로. 아직 아무것도 ‘그럴싸한’ 미술처럼 연출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기억한다. 관객으로서 나에게 남은 유일한 기억이다.
이제 나에게 미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순전히 의미론적인 맥락에서. 비평의 이름으로 미술을 십자말풀이 했던 모든 시도를 폐기했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애초에 비평 자체보다 (미술) 비평가로 호명되는 방식에 몰두했다. 십자말풀이가 도대체 뭔지? 그런 건 종이 신문에도 실리지 않는, 너무 오래돼서 퀴퀴한 과거의 삽화에 불과하다. 1980년대? 1990년대? 아니면 2000년대 초/중반? 하여튼 그 시기를 경유한 누군가는 아침마다 배달되는 종이 신문을 주섬주섬 읽었을 것이다. 그러다 무심코 십자말을 풀었을지도. 아마도 정답은 다음 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아니 지금에 이르러 다음 호를 펼친다면 말이지만.
나는 여러모로 펼치지 않았다. 미술, 더 정확히 말하자면 2010년대 서울에서 추문처럼 떠돌던 어떤 미술의 정황에 실시간으로 화답하기 위한 글을 썼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실이 날조됐다. 내 글은 비평의 구실은 물론이고 그게 어딘가 남아있다는 전제하에 객관적인 기록으로도 구실하지 못한다. 정황은 결국 정황으로 그친다. 다만 추문은 (내가 지금까지 쓴 비평과 더불어) 무자비한 시간에 쓸려나간 이후에서야 자신의 정황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추문으로 술렁이는 모두가 부정하겠지만. 추문 속으로 잦아든 작업들이 있다. 내 역할은 그런 작업들을 일일이 짚어내면서 ‘그것’이 미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소일할 수 있는, 그러기를 추동하는 유일한 역할 놀이에 가담했다. 누군가는 작가, 또 다른 누군가는 기획자, 나는 비평가였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전시장 안팎을 배회했다. 우리가 각자의 역할에 몰두할수록 서로에 대한 개연성이 생겼다. 미술이 그 자체로 임박하는 순간이다. 2010년대 서울, 그곳으로 향하는 골목마다 도사린 미술의 환영이 픽셀처럼 부서지고 있다. 아니, 오래전에 부서졌다. 이제 정답은 어디에? 어지러운 빈칸들 사이에서 나의 손짓은 머뭇거린다.
그러나 암송은 계속돼야 한다. 나를 미술에 헌사하고 싶지 않다. 미술은 고작해야 통조림 캔을 따기 위한 (사적인) 빌미일 뿐이다. 내가 바닥에 엎지른, 질척거리는 무언가. 기억으로 희석된.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 사이에, 나는 ‘그것’을 미술로부터 훔치고 싶다. 무슨 작업이 늘어선 전시장 밖으로. 전시장이 아닌, 그럴 수밖에 없는 어딘가로 남몰래 흘러넘치듯이.
2.
몇 차례의 자살 시도가 있었다. 그건 퍼포먼스가 아니다. 나는 술에 취한 채 온갖 약물을 남용했다. 2주일 치 분량으로 처방된 정신과 약들을 포함해 당장 입속에 털어 넣을 수 있는, 나에게 독성으로 작용하리라고 짐작되는 모든 것을 샅샅이 뒤졌다. 정신을 잃은 순간은 언제이고 언제쯤 다시 깨어났는가? 잘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내 의식 속에 각인된 장면 하나. 어딘지 모를 텅 빈 복도를 배회하다 방문을 열었고 거기엔 나체로 누워 있는 남녀 커플, 나보다 더 얼이 빠진 사람들이 보이고 저 사람 약한 거 아니야? 연신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 어느새 모텔 카운터 앞에 붙들린 채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로젓고 주인은 이번만 봐주겠다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한다. 모텔 밖으로 혼자 기어 나와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 이러다 차에 치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 혼자 그렇게 주장하면서. 그러나 살았다. 병원에서 집으로 고스란히 반려됐다. 자발적으로 집 근처의 무슨 정신과에 찾아간 것이다.
그게 몇 번째였는지 셀 수는 없지만, 그 당시에 나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다시 가족과 함께. 매일 나를 엄습했던 지루한 오후 내지는 저녁. 둘 사이엔 느슨한 매듭조차 없다. 어쩌면 아파트는 불행의 발단이다.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는 행운을 누렸고 그래서 (아직까지 나의 기억 속을 헤집는) 무슨 동네에서 여기로 왔고 여기 바닥은 대리석 질감의 무언가로 도배돼 있지만 내가 그 바닥을 어떻게 디뎠는지 막연하다. 양말을 신으면 미끄러웠던 바닥, 내가 갈수록 더 미끄러진 그곳. 아무도 널찍한 거실을 드나들지 않았다. 모두의 기척이 잦아들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갈구한 적은 없다. 이미 충분히 누렸다. 유년 시절의 사진 속 내 모습은 대체로 화목하다. 경제적인 수준과 무관하게. 가족 내력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른다. 엄마는 그냥 무심코 어느 옥탑방의 풍경을 환기시킨다. 서울에서 좌초된. 천장에 곰팡이가 슬어 있는. 모든 시설이 노후했다. 부모님은 아무런 경제적 유산도 물려받지 못했다. 그래도 결혼식은 치렀을 텐데. 그게 최초이자 최후의 유산이었나? 곰팡이는 무엇보다 면역력을 악화시킨다. 모두가 병들었다. 아직 담요에 싸인, 두어살 남짓한 나의 잔병치레가 결정적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거기로부터 도망쳐야 한다고 직감한다. 주거 환경을 여러모로 개선하기로 한다. 다른 동네에 정주할 필요가 있다. 쪽방을 낀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1990년대 초반의 서울을 기억해? 서울의 벽지였을 그곳을? 질문은 내키지 않는다. 구술하는 순간부터 후퇴하는.
실망은 가파르다. 우리 가족은 중산층이라는 개념 자체를 숙지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밀레니엄을 기약하고, 카운트다운에 다다르자 주변의 환호성이 점차 가깝게 들리고, 옥상의 난간 아래로 무력하게 구르기 전에 도심 한가운데서 이삿짐 트럭이 경적을 울린다. 다른 경적이 화답한다. 그 사이를 굽이치다 바로 여기, 이를테면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 말끔하게 구획된 자리들 중 하나에 도착한다. 이전까지의 고생스런 나날을 모두 수포로 돌린다. 가족들 중 아무도 발설하지 않으므로,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때보다 아파트 값이 몇 배로 올랐어. 너희 아빠는 왜 이렇게 운이 없니. 우리는 항상 왜 이러니. 한탄은 딱 거기서 멈춘다. 엄마가 뒤늦게나마 치른 공인중개사 시험이 일컫는 대로 우리가 무슨 중산층에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 즉 아파트 이후로 더 이상의 부동산 거래가 동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비상사태는 지금으로 치미는 생계의 고투 앞에서 금세 무의미해진다. 나와 일곱 살 차이나는 여동생이 성인으로 접어든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은 이혼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분란이 있었는지 들은 바 없다. 다만 아파트를, 한때 ‘그것’이 담보했던 무슨 브랜드 가치마저 거스른 채 염가에 처분했다. 어느 가족이 우리와 바톤을 터치했다. 그들은 우리 가족보다 한참 젊었고, 이제야 짐작컨대 (경제적으로) 약아빠졌다. 그들의 일상을 무사히 지속하기 위해서.
내가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이전, 약간의 시차가 필요하다. 이대로 지속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그런 식의 결단은 처음이었다. 어느새 나는 ‘여기’에 혼자 좌초됐다. 아파트를 떠나 대학 근처의 복층 원룸을 계약했다. 통학하기 위해 출퇴근 구간에 실리는 일이 버거웠다. 편도로만 2시간 남짓 걸렸다. 반면 이사는 단조로웠다. 아빠 차로 최소한의 짐만 옮겼다. 아파트에서 여기로. 혼자가 아닐 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벌 떨었다. 내가 벌벌 떨고 있다는 사실이 명료해졌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 무슨 약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삼켰다. 그 순간은 여러모로 각색됐다. 주변 풍경의 해상도가 갈수록 높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속에서 더 이상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의 시야 속에서 통제할 수 있는 이미지야말로 풍경 그 자체다. 집으로, 나의 복층 원룸으로 돌아오는 길은 순조로웠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프로이트를 인용하자면. 그게 첫 마디였다. 점차 말수가 늘었다. 강의실은 분주했다. 미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입시 준비는 생략했다. 애초에 입시를 위해 공부한 적이 없다. 사교육 버블은 (아파트 전후에 우리 가족이 정주했던) 강북에도 치밀었다. 그 현장으로 침수되지 않았다. 가족 차원에서 공유한 행불행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억지로 무슨 지문을 외워야 했을 때,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침묵 속에서 속이 뒤틀렸다. 그러다 실제로 도망쳤다. 화장실 칸에서 구역질을 반복하다 조퇴했다. 불면에 시달렸다. 아무도 그게 병리적인 증상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이런 씨발. 씨발. 중얼거리다 차도로 뛰어들 뻔했다. 나의 등을 밀치는 출처 모를 배후가 도사리고 있다. 교복 차림의 나는 아직 프로이트를 인용할 수 없다. 억압과 분출은 무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일상을 물리적으로 훼손했다. 그러나 미대에, 바로 그 강의실의 발표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그때의 내가 무슨 도서관에서 매수한 책들이 필요하다. 새로운 지문과 경구들. 입시와 무관하게 고고하기 짝이 없는 지식을 따라 읊는.
3.
친구가 종종 털어놓은 ‘미술’에 매료돼서, 아니 그 사람이 3수를 모면하기 위해 어쩌다 들어간 무슨 학교에서 배우고 적응하던 일화들이 여기와 너무 달라서, 거기로 갔다. 여기에 나를 규명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말 하나도 다르지 않게 존재 가치가 희박했다. 하루 14시간씩 (당시에도 노동법 위반이었다.) 빈 접시를 치우고 손님들을 응대하고 그마저 서툴러서 주변의 핀잔을 샀다. 이때의 주변이란 남자로 구성된 호모 소셜을 의미한다. 내가 번번이 저지르는 실수들을 의심하다 끝내 무시를 표명하던 눈초리. 주정처럼 너울대는 수근거림. 일이 끝나면 그들과의 술자리에 합석했다. 그날을 수습하기 위한 의례에 가까웠다. 온몸이 고작 하루치의 노동으로 부서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대화를 튼 사람들, 갈수록 호의를 나눴던 관계의 당사자는 전부 여자였다. 도대체 왜? 그들은 나처럼 무능하지 않았다. 직책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주변 남자들보다 우위를 점했다. 호모 소셜에서 빌빌거리는 모습은 상상 밖의 일이다. 물론 이 모든 건 그냥 알바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것을 위해 1년 반을 허비했다. 생계 유지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냥 별다른 계획도, 의지도 없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모두가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면서 매일을 탕진하는 피/착취자였다.
여기는 노동의 치외법권, 이를테면 서빙하느라 막차를 놓쳐도 추가 수당 같은 걸 받을 수 없는, 딱히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는 무슨 프랜차이즈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인 범주다. 혹은 커뮤니티다. 어쩌다 여기에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일한 방식은, 똑같이 날조된 (비정규직) 계약 조건 속에서 내가 감수하는 노동만큼 일하거나, 그걸 초과할 수 있는 개개인의 수완을 치하하는 것이다. 누가 누가 더 빠르게, 많이 빈 접시를 치우는가? 홀을 지배하는 직원, 아니 알바생은 누구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들’이 유지하길 바랐던 커뮤니티의 균형을 방해하는 존재였다. 바로 그 균형 자체가 착취의 메커니즘을 스스로 납득하게 만드는 원인이자 결과라는 사실은 과감히 생략됐다. 하루 14시간, 주 6일제. 여기를 여기로 규정하는 불공정한 노동의 관성에 무뎌질 뿐. 나와 교유했던 사람들도 결국 ‘그들’에 속했지만 그들은 나를 ‘그들’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내가 남달랐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여기 이전에는 어디 있었는지, 여기에서 어디로 떠나고 싶은지, 일주일 중 하루 그 짧은 여분의 시간 동안 무엇으로 소일하는지,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지. 억지로 캐묻지 않는 동안 우리만의 농담 코드가 생겼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같이 담배를 피우면서 실없이 웃고 마는 사람들. 아니, 누나들. 좀 힘드네요. 그러게. 이러다 접시 무더기로 깨면 네가 대신 수습해줘. 아니, 저 같이 미천한 자가 무슨 수로? 그러게.
그러던 어느 날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틀거린다. 공휴일인지 뭔지, 유난히 바쁘고 지친 하루였다.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흡연구역으로 통하는 비좁은 복도 맞은편에서, 나에게로 걸어오는 누나한테 뭐라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불시에 모든 기억이 암전됐다. 최초의 발작이었다. 깨어나자, 나는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 사실에 만족했다. 이제 퇴근이다.
4.
내 머릿속에는 몇 센티미터인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물혹이 있다. 처음에 ‘그것’은 종양으로 거의 확신됐지만, CT 촬영을 통해 악성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그냥 선천적으로 달고 태어난 몸의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몸의 일부. 그러나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 나는 ‘그것’이 나에게 각인된 죽음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그것’에 의해 죽음이 임박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다고. 무슨 준비?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주변이, 복도가 낯선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어느새 가운을 펄럭이며 다가온 의사 선생님이 머뭇대는 표정으로, 종양과 마음, 준비, 그런 단어들을 다시 일러줬다. 돌팔이 새끼.
아파트로, 나와 가족의 집으로 반려됐다. 온몸이 더러운 수건처럼 뒤틀린 채. 당연하게도 산재 처리는 되지 않았다. 어차피 거기는 그런 곳이니까. 며칠을 내리 쉬었다. 사실 그 이후로도 계속. 남은 알바비는 머리 탈색하는 데 썼다. 두세 번 정도 물을 뺀 것 같다. 거의 금발에 가깝게. 그렇다. 내가 멍청한 금발 머리가 됐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여러모로 생소해서 웃겼다. 두피가 조금 따가웠다. 안녕히 가세요. 연예인 누구 닮으신 것 같아요. 김수현이요. 근처 소파에 푸지게 앉아있던 친구는 돈 좀 썼더니 립서비스 잘한다고 저 혼자서 빈정거렸다.
병신 새끼들. “병신. 병신.” 나는 그런 표현에 점차 둔감해졌다. 아무도 나를 ‘병신’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냥 병신이 병신 새끼들이랑 술 마시고 싸우고 여자들 꼬시러 다닌다고. 발작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깨어나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의사는 금주를 권유했다. (돌팔이 새끼.) 그런데 술을 안 마시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게 아닌지. 친구들, 그 병신 새끼들도 그러려니 했다. 그중 몇 명이랑 작업실 비슷한 걸 구했다. 그 당시에 엄마는 성수동 근처에서 운영하던 카페를 막 정리한 참이었다. (계속 운영 중이면 지금의 성수 바이브에 편승했을까? 엄마도 참 운이 없다.) 카페 바로 건너편에 좀 더 그럴싸한 빈티지 감수성으로 꾸민 카페 겸 바가 생겼고, 거기로 젊은 인파가 샜다. 엄마 카페에서 쓰던 원목 테이블을 작업실로 옮겼다. 처음 보는 수입 맥주 몇 궤짝도. 작업실 보증금은 없었다. 그냥 화장실 딸린 단칸방에 가까웠다. 우리는 거기서 술 마시고, 술 마시다 잤다. 나는 몇 번 쓰러지고. 그래도 책장에 뭔가 드문드문 꽂혀 있는데, 무슨 비평? 이게 뭔데? 자기 교수님이 쓴 책이라고 했다. 하여튼 미술 얘기. 현대 미술. 그렇다. 그게 바로 내가 전해 들은 일화의 시작이다.
원래는 영화 감독이 되고 싶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다한 채, 온갖 영화들을 불법 다운로드하던 나날들. 도대체 왜? 평론가 정성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거나 썼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나는 무슨 아카데미에 다니다 반년 만에 때려치웠다. 그 당시에 시네필로서 손에 꼽은 영화 리스트는 뻔했다. 누벨바그, 중국과 대만 뉴웨이브, 차이밍량. 왕빙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이게 다 정성일 때문이다. 반면 거기 있었던 동기라고 하기에도 뭐한 사람들, 아니 현란하게 카메라를 비롯한 온갖 장비를 나르고 설치하면서 전문직 스탭인 척 굴던 남자 새끼들은 지들끼리 충무로에 한사코 비비려고 현장 뛰는 데 바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그들의 부름에 응답했다. 어느 날 그들과의 술자리에서, 딱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시종일관 버벅거리던 나를 두고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저 새끼는 영화 못 하겠다.”
그 말은 충무로에 대한 일종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2024년 기준, 이제 대부분의 국내 영화사들이 충무로가 아니라 강남 모처로 이전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겐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OTT의 망령이 그들과 함께 하기를. 최소한 베이직 구독이라도 했으면.
나를 규명할 수 있는 언어. 돌이켜보면 ‘그것’을 모색하려다 모든 언어를 잃어버렸다. 사람들 사이와 앞에서 벌벌 떠는 와중에, 무엇보다 그 시간이 지나간 이후부터, 나를 모욕하기 위한 후렴구만을 반복했다. 나는 영화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서빙하다 누나들 대신 접시를 무더기로 깰 것이다. 쓰러지고 발작할 것이다. 불면으로 기나긴 밤을 지샐 것이다. 기타 등등.
5.
스스로를 계급적인 차원에서, 특정한 계급의 범주로 이해한 적이 없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다하기까지, 사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거기서 추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하여튼 입시와의 간극을 절감하면서 그와 별개로 따라 읊었던 (고고하기 짝이 없는) 지식은 대개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당시 어느 웹진에 비/정기적으로 기고했던 영화 논평들의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처연한 야심이 아직까지 메아리친다. 이를테면 청년 논객을 자처했던 허지웅의 사례. 여기를 탈출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여기 바닥, 심연으로 접어든 문턱에 눌어붙지 않겠다는 아우성 같은 것. 2000년대 초/중반 어느 고시원의 접이식 침대에 몸을 구긴 채로 여기는 도대체 뭔지 ‘우리’는 왜 번거롭게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왜 옆방이나 건너편 타인과 서로 은밀한 유대를 느끼는지 되새기는 나날들. 결국 비판을 추동하는 것은 현실과 정치가 어설프게 접합되다 만, 가난이 역류하는 현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무수한 타인의 세속적인 욕망이다. 가진 게 없으므로, 임플란트를 악물고서라도 버텨야 한다. 여러분, 우리 함께 바닥에 자빠지지 맙시다. (고시원 속 누구도 화답하지 않는다.) 대충 그런 식의 스토리텔링을 주행했다. 나와 세대는 다르지만, 그러므로 나보다 앞서 사회에 닳은 어른인 게 분명한 청년으로서 다름 아닌 ‘우리’의 사적인 불행을 주장하고 고함치는.
지금은 안다. 그 모든 게 가부장적 마초인 (혹은 마초를 연기하는) 남성의 일인칭 서사에 그친다는 사실을. 어째서 일인칭으로 구성된 자아는 가난의 이름으로 억압과 분출을 거듭하면서 소위 비주류를 자처한 ‘그들’로 대변되는가? 2000년대의 정치적 공론장은 무엇인가? 아무도 각자의 계급을 누설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서사에는 분명 계급 내지는 계급성에 대한 징후가 있다. 즉 ‘계급’은 비/숙련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대변하고, 그런 식의 언사는 386의 전유물이며, 내가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여기는 386이 초래한 일종의 (정치적인) 폐허나 게토, 그 당시의 청년 세대에게 주어진 빈곤하기 그지없는 단어들로 집중 포화된 아수라장이다. 물론 그 현장에 전적으로 몰입하기 위해서는 2000년대 발 인터넷 게시판 문화, 즉 디씨나 이글루스에서 논객으로 거듭나기 위한 ‘병림픽’을 경유해야 마땅하지만, 여기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의 글과 포스팅을 통해 386에게 물려받지 않은, 그러나 누구보다 현실 정치=386과 계급적인 언어로 대립하고, 생각보다 자주 공모했던 생존 전략을 말 그대로 깨우쳤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공론장에서 들끓는 비판을 처절하게 무릅쓴 글은, 바로 그 비판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무기다.
주변 친구들과 입시 2년 차에 접어들 무렵, 웹진에서 연간 단위로 공모하던 상에 비평 부문으로 당선됐다. 켄 로치의 영화가 재현하는 역사 투쟁의 막간극이 아일랜드 민중에게 남긴 상처, ‘그것’을 빌미로 어떻게 여기 그러니까 서울시 강북구 모처에 틀어박혀 정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내용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자기 혐오를 일삼는 인생사 최초에 가까운 비평이지만, 조금 더 심도를 높이면 썩 괜찮은 구성인 것 같기도 하다. 386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분노 조절 장애를 겪고 있던) 무슨 학교 선생님의 눈에 들었고, 그의 요구대로 몇 차례 논술시험을 치렀으나 번번이 낙제했으며, 그 덕분인지 뭔지 나는 체벌에서 면제됐다. 어느 반에서 누가 체벌을 당하다, 내장 어느 부위가 터졌다는 소문이 아닌 팩트가 학교를 떠돌던 시기였다.
6.
친구의 친구인, 나와 친하지도 않고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주짓수를 포함한 온갖 무술을 취미로 삼은) 누군가가 교실 안에서, 내 의자에 침을 뱉었을 때 그건 어떤 모욕의 제스처였을까? 같은 학생인 주제에 무슨 지식인인 척 구는 메소드를 겨냥한 것인가? 그러나 나는 친구들과 적당히 어울리다 말다, 실제로 속이 뒤틀려 화장실로 도망치기 전에 조퇴를 반복했던 학교 부적응자에 가까웠다. 심지어 처벌 면제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386의 표본을 포함한 선생님들 모두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대했다. 자, 복도나 계단에서 마주칠 때마다 90도에 근접하게 인사. 활기찬 목소리 유지하고. 무슨 지식인과 하등 상관없는, 그저 제도 속에서 굴복을 되풀이하는 제스처일 뿐이다. 아파트로, 아무도 없는 나의 방으로 금세 되돌아가기 위한.
아파트에서 사는 것.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에게 아파트는 무슨 계급, 이를테면 중산층을 대변하는 상징 자본 같은 게 아니었다. 아파트 이전에 살던 동네에도 아파트 촌은 드물게 존재했다. 친구를 매개로 그곳에 가끔 드나든 적이 있다. 내가 그곳을 막연히 여유로운 공간으로 느꼈던 이유는, 그 친구가 바로 그 동네에서 나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누군가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친구는 이미 중산층에 근접한 상태였다. 어쩌다 여기에 가족과 함께 (계급적인 맥락에서) 불행하게 좌초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여기 이후의 삶이 우리 가족과는 다르게 일사천리로 보장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 당시 내가 어울리던 무리 중, 그 친구만 유일하게 나름 명문으로 꼽히는, 다른 동네의 다른 고등학교로 갔다. 주변 사람들 누구도 그런 진학 목표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참고로 나는 공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슨 상고에 지원했다가, 엉망진창인 내신으로 말미암아 떨어졌다. 앞으로의 불행을 위한 포석인 셈이다.)
문제는 그 친구가 나를 유독 친밀하게 대했다는 점이다. 사실상 나는 ‘그들’에게 말 그대로 영입된 처지였는데도. 우리는 갈수록 죽이 잘 맞았다. 같이 담배를 나눠 피웠고, 음담패설을 떠들었으며, 얼른 누구랑 섹스를 하네 마네 부추겼다. 물론 섹스의 대상은 전부 여자였고. 그게 고작해야 열네 살 즈음의 일이다. 우리는 ‘호모 새끼’가 아니었지만 (동시에 나는 스스로에게 낯선Queer 존재였다.) 컴퓨터 앞에 둘러앉아 몇 번이고 자위했다. 누구와의 섹스를 선망하면서. 내가 아파트로, 다른 동네로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 집은 무슨 소굴이나 다름 없었다. 섹스의 소굴. 그 외의 이런저런 불법적인 소일과 흡연, 술자리를 위한 소굴. 모두가 그 동네를 무슨 동이 아니라 무슨 리라고 불렀다. 그건 부모와 그 이전 세대로부터 부/자연스럽게 전승된 자기 비하적인 슬랭에 가깝다. 아파트 촌 말고는 개발의 기미조차 없어 보이는, 무슨 역에서 한참을 거슬러 내려야 도착하는 지역. 서울 속에 잔존해 있는 무수한 게토 중 하나.
거기서 나 혼자 가족들과 함께 부랴부랴 탈출한 이후, 사실 그때부터 관계의 역학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친구들과 통학 루트가 달라졌고, 혼자서 처음으로 파란색 간선버스를 탔으며, 그 사실로 말미암아 내가 어디서 훔친 담배를 피우는 뒷골목은 ‘우리’가 아닌 나만의 비밀로 남았다. 나는 ‘그들’과 멀어졌다. 그제야 혼자라는 사실이 실감됐다. 주변 사람들의 기척이 잦아들다, 완전히 사라진 여기. 어느새 LED로 바뀐 텔레비전을 틀면, 대리석인지 뭔지 모를 거실의 바닥에 매끄러운 불빛이 아른거렸다.
7.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너랑 자위하면서 너의 자지Penis를 만지고 싶었다. 우리가 서로 애무할 수는 없으므로. 남몰래 즐기던 게이 포르노에는 언제나 네가 너의 자지가 등장하지. 피스톤은 삽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여튼 그런 게 아니야. 처음 입가에 묻은 정액을 훔치면서 거울 속의 나를 주시했다. 얼이 빠진 표정. 모든 게 허무하다는 듯이. 그날 이후부터, 그날만을 떠올리면서 이제 성적으로 황홀한 느낌은 없어. 모든 섹스는 타산적이다. 내 얼굴에 정액을 뿌리면 나는 소스라치겠지. 우리가 이러기로 합의한 적이 있나? 우리의 정치적인 성향은 너무 다르잖아. 너는 존나 멍청하고 정치가 뭔지도 모르잖아. 네가 같이 사정하자고 졸랐을 때, 서로 해주자고 했을 때, 내가 한사코 거절한 이유가 뭔지 기억하라고. 우리는 (물리적으로) 싸울 수도 있었다. 아마 내 얼굴의 윤곽이 (물리적으로) 박살이 났겠지. 나는 너를 밀칠 수가 없다. 나는 너를 때릴 수가 없다. 근데 요즘 너는 걔랑 붙어먹는다고 하던데. 병신 새끼들. 무슨 클럽이 늘어선 대로변 어디에서 제발 차에 치였으면 좋겠어. 그냥 제발 좀 뒤지라고. 세상에서 사라져. 네가 모욕한 사람들이 너의 배후에 있기를. 주차장에서, 주차된 차 보닛 위에서 팬티를 벗긴다. 아니면 스스로 벗도록 유혹해. 그게 내 원체험이고 거세의 현장이고 지금도 천장을 두드리는 환청으로 잠을 깨우는데. 우리 손에 남은 자국들. 검은색. 타르. 영원히 문질러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피스톤. 피스톤. 내 입속에서 거품과 함께 흘러넘치는.
너는 전경이고 용역 깡패다. 뉴스에서, 철거 현장을 중계하는 라이브 방송에서 너의 모습을 본 것 같아. 유리가 깨진다. 너의 머리에 매달린 랜턴 불빛이 파편들을 뒤지고 있다. 그 속에서 발견한 머리채를 잡아서 바닥에 질질 끌고 있다. 청소를 하듯이. 고함 치고 주변을 협박하고 양손에 든 곤봉과 쇠파이프 난폭하게 휘두르는. 너에겐 자비가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엔 너를 밀치고 때릴 거라고 작심한다. 나는 너의 손길에 저항할 거야. 내가 우리가 박살이 나더라도. 아직 너를 마주친 적은 없지만, 거기에 네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곱씹는다. 거기에 네가 있어야만 하니까.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린 낯선 얼굴들. 우리는 어쩌다 누구의 자취방에 모여 앉아서 소주를 까고 있는지? 교복 차림으로? 장판은 거의 헐었고 그 밑에 깔린 바닥에서 곰팡이 냄새가 난다. 시멘트의 질감. 공포를 모면하기 위해 어색한, 일그러진 웃음을 짓고. 섹스를 하는지 누군가가 번번이 저항하고 있는지. 담배 필터가 침으로 눅눅해졌다. 불을 붙이지 않고 잘근잘근 씹다가 재떨이에, 선반에서 꺼낸 얕은 접시에 뭉개기를 반복한다. 너에게 호소한다. 손으로 매달린다. 처음 보는 여자애가, 누구의 누구의 애인이었던 사람이 벌벌 떨고 있다. 네가 그 여자애를 안방으로 회유하고 문을 잠근다. 셔터를 내리는 소리. 철컹거리는 신음. 여기 있는 모두가 무슨 사범이야. 걸레 같은 놈들이고. 어딘가, 골목이 굽이치는 벽지에서 또 다른 소굴을 틀었으니. 나는 다음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순서는 무작위다.
8.
라이브를 중계하던 채널이 종료된다. 여기,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무슨 아포칼립스가 도래하지 않는 이상 철거되지 않을 것이다. 책장에서 무작위로 꺼내든 경구는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우리’가 얼마나 개별화된 존재인지 호소하고 있지만, 나에게로 치민 절망을 더 이상 시스템 차원의 논리로 헤아릴 수 없다. 벌벌 떨리는 나의 몸은, 무슨 연대를 위한 장소, 아니 현장에서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는 사이에 갈수록 더 망가질 것이다. 익숙한 손길이 나의 머리채를 붙잡기도 전에, 저 혼자 바닥으로 꺼질지도 모른다. 발작의 전조가 느껴진다.
나는 그들, 아니 ‘우리’라는 사회적인 범주가 두렵다. 나는 여기서 절망적이지 않다. 그저 밤낮없이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돌팔이 새끼가 건네준 처방전에 따라, 일상 주위에 펜스를 두른다. 여기 아닌 곳에 도사린 위험 요소를 솎아내듯이. 거실 바닥이 납작하게 고르다.
9.
좌파 포퓰리즘 같은 건 없다. 우리, 아니 우리의 권리는 허구에 불과하다.
10.
아버지가 강변에서 시체로 건져졌을 때, 그 순간마다 서울 도처에 발생하는 싱크홀. 위치 감각은 교란되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 우리 아빠는 한 번도 죽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부터, 아파트에 갓 입주한 무렵 체어맨을 몰기 시작했고, 그건 일시불인가? 아니면 몇 년에 걸쳐 분에 넘치는 할부금을 치러야 하나? 차의 외관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차에 관심이 없다. 그냥 냄새가 달랐다. 공간의 여분에서, 고급 방향제가 풍기는 쾌적한 냄새. 그 이전에 어떤 차를 몰았고 거기에선 어떤 냄새가 났는지. 밀레니엄으로 터덜거리며 질주하는 승차감. 밀레니엄은 갈수록 멀어진다. 노후한 시설과 그것의 온갖 틈새에서 번식하는 곰팡이와 함께. 두드러기를 유발하는, 종이 신문에서 오려낸 잔상들. 흑백에서 이제 막 건져진. 옥탑은 낮고 어스름한 하늘 아래 펄럭거린다. 나는 그게 가난의 지표라고 생각한다. 386에 편승하지 않거나 못한, 그보다 조금 앞선 무슨 세대인지 모를 (베이비부머에 가까운) 모집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유한, 정치적으로 변색된 전초 기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가족의 내력을 알고 싶지 않다. 아빠가 태어난 1965년에서 시작하고 싶지 않다. 아빠의 아빠가 태어난, 아마 서울이 아니었을 또 다른 벽지에서도. 체어맨의 바퀴에 깔린 것은 무엇인가? 내가 불면에 시달리던 천장의 그을음?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지, 나에겐 그런 권한이 없다. 다만 서울은 그때부터 픽셀 단위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해상도 차원에서 조절된 욕망이 거실의 외관에서 파편으로 튄다.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여기는 적막한 게 아니라 모든 소리가 묵음 처리돼 있다. 층간을 차지하는 내장재를 뜯어보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선 아파트 단지 철거하고 펜스를 둘러 사유지로 삼아야 한다. 빨간색 라커로 분사한 권리 보장과 안전을 위한 구호, 엑스자 표시를 장식으로 장식인 것처럼 소비해야 한다. 나는 “자유의지”라는 문구 앞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 아니면 내가 “자유의지”를 찍었나? 모든 표적은 잠재적인 이미지다. 혹은 이미지의 표현이다. 적대하거나 앙심을 품을수록 더 그렇다. 서로를 겨누는 시선, 그것은 불발되면서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이미지는 스스로를 훼손한다. 이미지는 액정 너머에서, 액정의 표면을 따라 스크롤되다가 나의 선택과 유/무관하게 방치되고 불시에 유포된다. 손가락으로, 혹은 마우스 커서를 교란하면서 경로를 추적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미 유실된 원본의 지점에서 되돌아온 또 다른 이미지, 그 무수한 사본들은 액정을 표시하는 물리적인 경계에 가로막힌다. 충돌한다. 나의 배후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차도로 밀치지 않았어도 결국 사고는 벌어질 운명이었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함께, 나는 스크롤된다. 우리의 죽음을 날조하는 전지적인 존재의 모습이 액정에 비치면 그게 나라는 사실이 탄로난다. 우리가 어떻게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면? 그렇다. 모든 사고는 되감을 수 있다. 내가 설정한 배속에 맞춰서. 펜스와 충돌하기 직전 잔뜩 부풀려진 체어맨의 몸집을 프레임 단위로 강변 교차로에 옮겨놓는다. 나의 시야가 액정 속에서 멀어진다. 갈수록 암전되는. 그리고 다음 이미지. 다음 이미지로 스크롤링. 지문이 덕지덕지 묻은 잔상들. 철저하게 (알고리즘 차원에서) 계산된 잔상 효과.
이제 정치적인 효력을 다한 구호들은 전부 검색창에서 지운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는 허구에 불과하다. 아무도 액정에, 스크린에 돌을 던지지 않는다. 어떤 파문도 없으므로. 그저 서울의 풍경, 도심 어딘가를 ASMR로 관람한다. 일상은 지속되면서 루프한다. 일상은 번화가에 위치한 어느 카페, 어느 전시장의 벽면에 전사된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배경 화면으로 삼아 무슨 게임 속 NPC처럼 늘어선다. 대체로 넋이 나갔다. 자기 얼굴에 드리운 예리한 파편들이 픽셀의 자국이라고 확신한다. 스크린은 참화의 현장을 예비하고 있다. 스크린이 참화를 중계하기 직전, 몇 초의 간극을 두고 여기가 (물리적으로) 박살날 것이다. 재난 문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 와이파이의 대역폭에서 수신될 것이다. 외부에 대한 위화감이 나를 엄습한다. 나의 시야에 드리운 불투명한 장막, 액정, 스크린은 외부를 여과하지 못한다.
11.
우울과 불안만큼은 내재적이다.
12.
미대에서, 처음으로 내가 매료된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서현석, 올라퍼 엘리아슨, 소피 칼. 그들 사이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들이 실제로 어디서든 마주쳤을 것 같지도 않다. (이를테면 비엔날레 차원에서 그들이, 그들의 작업이 하나의 담론적 주제로 묶이고, 그 안에서 상호 교차하는 상상은 너무 끔찍하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의 작업을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할 것이다. 올라퍼 엘리아슨이 온갖 공학 기술을 동원해 2003년의 터빈 홀에 띄운 태양, 그 거대하고 야심으로 일렁이는 발광체는 서현석과 소피 칼의 관점에서 재현된 물신, 오로지 ‘그것’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스펙터클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태양에 과도하게 노출돼 있다. 온실가스가 자욱한 대기 아래에서, 혹은 누군가 불시에 꺼내든 스마트폰의 내장형 플래시 때문에 눈을 찌푸린 채로. 이태원 무슨 클럽에 입장하려면 플래시 방지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 아무도 오늘 밤을, 평일 동안 지속된 낮의 열기가 잦아들기 시작한 지금 이 순간을 빛으로 방해하려는 음모와 계략을 꾸미지 않는다. 그냥 나와 더불어 여기서 놀고 싶을 뿐이다.
소피 칼은 1953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작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 사실 그 이후에도 스마트폰은 존재한 적이 없다. 서현석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가 을지로 근방에서 <헤테로토피아>(2011)를 기획하는 동안 스마트폰은 내내 방전돼 있다. 참고로 나는 <헤테로토피아>를 관람한 적이 없다. 무슨 강의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에 수록된 이미지를 통해, 카세트 플레이어의 지령에 따라 을지로 골목을 누비는 나의 모습과 (관객으로서) 내가 마주쳤을 풍경, 혹은 풍경의 스크립트를 상상할 뿐이다. 2011년에 나는 을지로가 아닌 혜화역 인근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손님들이 비운 접시를 양손 가득 나르고 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뇌전증으로 쓰러질 것이란 사실은 모른 채로. 나와 매개된 GPS를 상시 의식하고 있다면,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 장소와 위치들을 어떻게든 이어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GPS 객체는 그냥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 점을 일인칭 화자로 삼아 내 이야기를 구술하기 시작한다. 사후적으로. 서울의 지도는 3D로 매핑된 채 나의 이야기를 따라, 뭔가 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다중 시점으로 사건의 현장을 탐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현석은, 혹은 그가 연출한 <헤테로토피아>는 나에 대한 징후로 느껴졌다. 어쩌면 소피 칼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베네치아의 어느 대로변에서 우연찮게 마주친 남자를 13일 동안 미행한다. 1979년의 일이다. 논/픽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난한 과정은 그보다 한참 뒤에 비평의 이름으로 기록 및 해제될 것이다. 소피 칼의 『진실된 이야기』를 읽고 나서, 사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읽었는데, 하여튼 나는 이 모든 내용이 그녀가 추적한 단상들로 이루어진 독자적인 세계, 평행 우주라고 생각했다. 현실에서의 사건, 즉 낯선 뒷모습에 이끌린 바로 그 순간을 발단으로 삼지만, 현실로 전개되지 않는. 차라리 현실 자체와 무관한.
올라퍼 엘리아슨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1967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지만, 그 사실은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날씨 프로젝트>(2003)는 나와 소피 칼과 서현석이 직감했듯 태양이라는 신성으로 스펙터클의 효과를 거의 무한하게 발산하고 있고, 나는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떤 자본이 유입됐든 간에 ‘그것’이 미술일 수 있다는 사실에 경도됐다. 그 장면은 프랑코 베라르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래 이후”의 모습을 (내가 2003년 이후에 목격한 것은 삽화에 가까운 인공 태양의 이미지에 불과하므로) 시각적으로, 삽화 차원에서 재현하고 있다. 문제는 다시 스마트폰에 관한 추문으로 이어진다. 즉 인공 태양은 관객들 각자의 시점에서 다각도로 촬영되거나 중계되지 않았다. 구글에 남아 있는 이미지는 석양에 가까운 로맨틱한 불빛이 스며든, 미술관 측에서 극적으로 연출한 사진들뿐이다. 제멋대로 날조할 수 없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기 위한 의지가 결여된 이미지. 리얼하지 않음. 시대적인 맥락에서.
내가 이 모든 사진, 이미지, 삽화와 마주쳤을 때,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미술) 비평을 하기 위한 증거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노트 필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에겐 실시간으로 클라우드나 아이폰, 무엇보다 그 모든 걸 활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적 역량 자체가 없었다. 미대에서 갓 졸업한 이후의 2010년대가 어떤 식으로 막이 올랐는지, 그 사실은 아직 까마득한 미래로 남아 있다. 나는 이제 막 무슨 알약을 한 움큼 삼켰을 뿐이다.
13.
태양은 저물었다. 혹은 공학적인 절차에 따라 철거됐다. 나는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헤쳤는지 모른다. 다만 ‘날씨 프로젝트’를 뒤지다 발견한 무슨 사진 속에서 그들 혹은 그들의 윤곽은 로맨틱한 불빛에 휩싸인 채, 사진의 표면에 어슷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구글 이미지 검색 결과에 따라) 영원히 박제돼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혹은 어떤 유형의 관객이자 소비자인가? 2003년의 터빈 홀로부터 그들 각자를 수소문해 미술과 ‘그것’에 대한 경험을 탐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이름을 생략한다는 전제하에, 일련의 사진들은 ‘컨템포러리’로 간단하게 색인 처리된다. 동시대성, 글로벌리즘, 그런 식으로 연상되는 미술에 관한 추문은 그냥 오래된 추문으로 그친다. 미술 시장은 더 이상 인공 태양의 가능 조건처럼, 그것을 충족시킬 만큼 뜨겁게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투기성 자본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미술의 시대 정신을 규정하거나 국가와 인종, 젠더를 초월할 만큼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시장성에 홀리지 않은) 대다수가 직감하고 있다. 나의 경우, 나라는 존재가 무슨 투기를 유도할 만큼 가치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버블 이후after에 도착했다는 것. 그 사실이야말로 내가 배운 미술의 서론이다.
학교 주변, 서울 모처의 아파트에서 벗어나 난생처음 자취를 시작한 여기는 대학가 중심으로 재편된 주거단지에 가깝다. 나와 (내가 약 기운에 취해 주절거린 사이비 이론을 들어준) 친구들은 고가도로 아래에 늘어선 오피스텔, 그보다 염가에 처분된 어느 주택의 반지하, 고시원 등에 살았다. 내가 부모님의 경제적인 원조를 빌려 선택한 곳은 학교에서 도보로 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의 복층 원룸이었다. 복층이라 어느 정도 숨이 트였고, 무슨 옵션이 딸렸으며, 부모님은 그 사실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건물의 입주민 대다수가 같은 학교를 다니는, 그러나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고, 딱히 서로 궁금하지도 않은, 엇비슷한 학생이자 단기 계약서로 묶였다. 우리 집 위층에는 누구, 건너편 집에는 누구의 누구가 사는 식이었다. 졸업 주기에 따라 계속 교체될 인구의 모집단. 그리고 그들 각자에게 주어진 원룸 구조의 큐브. 부동산 업자의 관점에선, 학교가 망하지 않는 이상, 수요 공급의 원칙이 보증된 매물 형식이다.
2014년, 그해에 우리 주변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박근혜 정권 2년 차였고, 여전히 도처에서 무슨 파업과 시위가 잇달았으며, 그 와중에 가장 크게 각인된 것은 역시나 세월호 참사다. 이제 막 새 학기로 접어든 무렵, 뉴스로 보도된 무수한 죽음들. 나는 트위터를 삽시간에 장악한 온갖 매체의 뉴스와 뉴스에서 발췌된 단신으로 참사의 소식을 좀 뒤늦게 접했다. 늦잠을 잤거나, 1교시 수업 때문에 이제 막 눈을 뜬 어스름한 아침일 것이다. 배가 가라앉는 중이다. 혹은 이미 침수됐다. 기타 등등. 스마트폰의 기상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잠결에 삭제한 걸지도. 종종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는 무슨 알람을 맞추면, 이상하게 그 시간 전에 깨어난다고. 농담이 아니었다. 취침 전 먹는 약들에 수면제도 포함됐지만, 그래서 금방 잠들었지만, 다음 날 일정이 있다는 사실을 곱씹으면, 잠에서 깨는 건 순전히 나의 의지였다. 그날도 그랬나? 나한테 무슨 일정이 있었나?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가 될 때까지 말이다.
잘 모르겠다. 무슨 스케줄러에는 흔적조차 없다. 왜 그 당시의 나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파기했을까? 언제부터 기록이라는 형식 자체에 갈수록 둔감해졌는지? 사실관계에서 어긋난, 아니 사실 자체가 없는 (소셜 미디어에서 비롯한) 정보의 과포화 상태로 머리통을 절인 성인 ADHD 환자의 말로 같은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차라리 그런 정보를 스스로 날조하고, 비평이라는 명목하에 퍼뜨리는 좀 악질적인 인간 유형에 가까우므로. 출처가 사라진 인용구들은 내 기억 속에서, 오로지 기억의 관성에 의해 조잡하게 얽혀 비평으로 완성된다. 그걸 자동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시간으로 미술에 화답하기 위한 그 모든 글들, 아니 비평을?
14.
지금이 버블 이후라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남은 자산이 없다는 의미다. 심지어 인덕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넘게 들어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여기에선 더더욱. 우리 사이의 계급적인 차이는 다소 묘연했다. 출신 성분은 제각기 다를 테지만, 그것을 계급의 문제로 환원한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면, 사실상 서울대나 홍대가 아닌 여기에 헤쳐 모일 이유가 없다. 그 당시 학교는 2년제였고, 나는 거의 편법에 가까운 (예술의 자율성에 입각한) 전형으로, 내가 포기했던 입시 성적과 무관하게, 간신히 대입의 문턱을 넘었다. 충무로 모처에서 찍은 단편 영화를 개인 포트폴리오로 제출한 것이다. 그 영화는 요제프 보이스와 차이밍량의 작업을 리믹스한다는 명목하에 야심차게 실패한 졸작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일상 속에서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과에서 진료받기 이전이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면서 교수들과의 면접을 치렀다.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치른 유일한 정신 승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나와 동석했던 누군가는 주변에 박카스를 돌렸다. 그 이후로 학내에서 그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안타깝지만, 미술은 서론에 불과하다. 그 당시의 나에겐 그랬다. 오래전에, 아마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삼아 버블이 극적으로 사라졌다면, 그럼에도 여전히 ‘컨템포러리’가 대형 작가들이 구사하는 사치스런 미사여구로 남았다면, 나는 우리는 버블의 효과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으로. 그렇게 정치는 여야에 국한된 당쟁의 문제를 넘어 다시 나에게 되돌아왔다. 미술의 이름으로. 미술에 내재된 정치적인 역량이 무엇인지, 이를테면 후기 자본주의의 국면에서 아방가르드를 재현할 수 있을까? 아방가르드는 혁명과 전복을 위한 수사인가? 무슨 교수님은 매 강의마다 유럽 사민주의를 연상케하는 자유로운 논의의 장을 펼쳤지만, 거기서 토론 비슷하게 얘기를 섞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약 기운에 취한 나머지) 그중 일부가 됐다. 교복 차림으로 주행했던, 이 환란의 시대에서 무산계급으로 다시, 여러 번 태어난 논객들의 글이 도움이 됐을지도. 그들은 이제 고시원 생활을 청산하고, 종편 채널에 무슨 전문가나 MC로 출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미디어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교수님께선 나에게 할 포스터를 추천했다. 80년대 이후의 네오 아방가르드를 (미술) 비평가로서 좇았던 그의 남다른 궤적을. 그러나 대충 넘겨짚었다. 친구들과 비판 이론에 관한 스터디도 하고 정치색이 강한 학보, 아니 찌라시도 만들었지만, 그 당시에 내가 도대체 무슨 책을 읽었고, 네오 아방가르드든 뭐든 어떤 미술에 연루됐는지, 역시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로 들어서자, 기억의 점성이 강해진다. 흐물거린다. 나는 조울을 넘나들면서 내 존재를 과시하고, 모든 시선을 독차지하길 원했으며, 그에 부합하는 확신에 찬 헛소리와 농담이 늘었다.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면서 싫어했다. 우리 집은 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술을 마셨고, 아무나 침대에서 자고 갔다. 그냥 내키는 대로 학교에 드나들었다. 도보로 5분. 무슨 삽화에 불과한, 단조로운 풍경들. 작업이나 리포트는 나에게 너무 손쉬운 과제였다. 출처가 없으므로, 내 직관에 따라 읊고 혼자서 성취했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의 대다수가 자격 미달이었다. 정물화를 그린다고? 도대체 왜? 다행히도 그들 앞에서 발작한 적은 없다. 차라리 억지로 몸을 뒤틀었다.
여기서 탈출하려는 계획이 없다. 다시 20분을 거슬러 인덕원역까지 가는 일조차 성가셨다. 가끔 네오룩을 비롯한 전시 홍보 사이트를 뒤적거렸지만, 내가 모르는 작가와 작업들 투성이였다. 혹은 ‘컨템포러리’의 잔여에 가까웠다. 애초에 미술을 배우려고 여기에 잠입한 게 아니다. 작가나 비평가를 꿈꾸지도 않았다. 다만 지루한 일상, 방이나 거실의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저무는 나날들을 만회하기 위한 극적인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내가 몰랐던 정병의 기미를 해결하고 싶었다. 이대로 순순히 죽는 게 무서웠다. 가끔 누나들이 묻는 안부에 뭐라고 대답할지 막막해서 답장을 무기한 미뤘다. 아파트는 언제나 그랬듯이 적막 그 자체였다.
15.
누가 어떻게 죽음에 저항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16.
2013.10.31
이건 무슨 과제의 일환이 아니다. 자발적이다. 퍼포먼스는 양일에 걸쳐, 그러나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진행한다. 가급적 학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점심 시간을 치르고 난) 오후에. 적당한 사이즈의 비닐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쓴다. 조형관 앞으로 모셔다 놓은 간이 의자에 앉는다. 봉지에 휘갈긴 드로잉의 선과 도형들. 내 시야는 불투명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외부를 보고 있지 않지만, 내 존재가 외부의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주변이 소란스럽다. 사형수처럼 목줄을 매달고 있으면 어떨까? 이대로 순식간에 낙하하면?
그 대신 집에서 침대 커버를 가져올 것이다. 이틀째, 나는 그 위에 드로잉과 함께 널브러져 있다. 시체가 아니라,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맛이 간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짐작컨대, 저 사람은 못생겼다. 그렇다. 비닐봉지는 일종의 복면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보지 못하는 거기서 확신할수록 성적으로 흥분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음이 잦아들 때까지 퍼포먼스를 위해 궁리한 패티시에 몸이 달아오른다. 자기 동일시의 순간. 모든 언어는 소음이다. 나에게 바친 음담패설이다. 사실 귀에 꽂은 이어폰은 작동하지 않는다. 플레이리스트는 없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이제 시간이 다할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으면, 만사가 형통하다.
나의 기척, 아니 존재를 흘기거나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연루될 것이다.
17.
그때부터 ‘흔들리는 죠’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a.k.a. 흔들리는 죠.
18.
나는 필사적으로 글을 썼다. 혹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개중에는 내가 실제로 보지 않은 전시와 관련된 글도 있다. 이를테면 고래 모양의 풍선, 암송을 기록한 (사적인) 일지들. 그 외에 서울 도처에서 자가 번식하고 있는 추문을 부르는. 그러나 여기에 앉아서 막연하게, 동시에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나의 기억처럼,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 개연성이 만들어진다.
트위터에, 누군가가 실시간으로 공유한 단상과 비평적 경구에 모든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그것’을 레퍼런스로 삼는다. 글은 언어는 현장의 소음을 따라 읊는다. 침묵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처음으로 본 전시가 뭐였지? 오늘을 기점으로 마지막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처음과 (갈수록 연장되는) 마지막 사이에서, 대체로 지루하거나 예측 가능한 나날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갈피를 잃는다는 사실이다. 미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서울은 미로가 아니다. 이미 우리에겐 지도가 주어져 있다. 언제든 우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그 사실에 안도한다. 나는 GPS 객체다. 하나의 점이다. 그러나 일인칭 시점을, 그것이 누릴 법한 화자의 역할을 상실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지도 위에서 명멸할 뿐이다.
1) 을지로의 골목에는 더 이상 (서현석이 모집한) 안내자가 없다. 그들과 작별할 것이다.
2) 역사는 싸구려다. 나에겐 ‘그것’으로 기록할 의무가 없다.
2015년, 그해는 언제나 정각으로 맞춰져 있다. 알람이 울리면, 사실 그 전부터 나는 깨어 있고, 나와 무관하게 피드가 실시간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 주변에선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이를테면 어떤 재난과 사고가 서울 안팎을 넘실대는 중인가? 그러나 뉴스는 무의미, 언론과 기자들이 휘갈겨 쓴 악필에 불과하다네. 미디어는,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미술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새 내 초점은 미술의 외부가 아니라, 갈수록 미술 자체로 수렴된다. 이때의 미술은 버블 이후의 사건이 아니고, 대문자 역사가 끝났다는 사실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정치적인 슬로건? 피드 속의 우리는, 최소한 나는 ‘그것’에 반응할 겨를이 없다. 전시장이, 거기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이 각자의 시점으로 유포되는 중이다. 거기에 참여한 대다수가 나와 동세대로 묶였다. 혹은 청년 미술가로. 무수한 익명의 계정들로. 나는 어느새 아이폰 유저가 됐다. 나는 아이폰과 동기화하기 위해, 여기에서 현장으로 기어든다.
아니면 여전히 갤럭시였나? 뭐가 됐든 SNS와 그것과 연동되는 어플들을 사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나의 인터페이스 연대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명확하게 짚을 수는 없지만, 하여튼 나는 결과적으로 스마트하다. 현장, 앞으로 ‘신생공간’이라고 부르게 될 그곳은 (사실 지금도) 나에게 양가적이다. 나는 거기에 있거나 없다. 때로는 없을수록 사실적이다. 많은 전시를 어림잡거나, 실제의 경험 차원에서 생략했다. 그럼에도 계속 쓸 수 있었다. 타임라인의 감각에 편승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존재를, 내가 쓴 글로 말미암아 노출시켰다. 이제 글은 자기 트래픽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유일무이한 생존 전략이다.
나와 내가 아닌 누군가의 시점이 타임라인 속에서 혼선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글은 픽션이다. 픽션이야말로 비평이다. 그건 더 이상 비평적인 언사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논증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무수한 점이다. 우리 각자를 일인칭으로 반전시킨다. 이제 우리는 서울 도처를 각자의 경로로 떠돌면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는 무슨 주체다. 결과적으로 스마트한.
19.
그러나 주체는 허구의 영역, 즉 마찬가지로 픽션이다. 주체가 스스로를 호명하는 방식은 언제나 의심스럽다. 자유의지? 혹은 자유의지가 불가능한 (후기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픽션의 형식으로 접어든) 시대적 조건에서, 잠자코 순응한 채 자신의 사유와 활동을 제약하는? 우리는 더 이상 주체적이지 않은가? 혹은 그럴 필요가 없나? 질문은 얼마든지 변주될 수 있다. 내가 모르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역사가 남긴 잔해로부터. 어쩌면 역사를 초월한 “미래 이후”에도 계속 그럴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피드는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다. 나와 무관하게.
20.
그래서 어쩌라고?
21.
주체에겐 얼굴이 있다. 혹은 얼굴만이 있다. 이건 순전히 미적인 문제다. 강박적으로 거울을 본다. 실제 거울과 대로변에 늘어선 스테인리스 구조물에 비친 흐린 잔상들, 보정되지 않은 셀카 모드를 포함해서. 내 얼굴은 망가졌다. 거울은 그 사실을 나에게 나날이 상기시킨다.
여드름이 홍조처럼 번지고 있다. 온갖 사소한 결함, 모자이크 조각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얼굴에 대한 미신. 외출하기 직전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워야 한다. 그러면 피부가 깨끗해질 것이다. 완전무결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다. 담배 연기는 일종의 스팀이다. 모공 속을 파고드는 발암 수증기. 방충망 열어젖히고 가만히 성스럽게 불을 붙인다. 하늘에선 매일 같이 역병이 돌고 있다. 나는 역병이 초래한 구정물. 구정물로 세수한다. 어제도 잠을 설쳤다. 잔뇨감 때문에 화장실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했다. 아무도 그게 병리적인 현상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입시를 포기한 고등학생, 모의고사 치를 때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 시험지로 코를 푸는 나에게 내린 신적인 복수인가? 성장 호르몬인지 뭔지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추문에 의하면, 양배추 삶은 물을 마시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정말 역겨운 맛이다.) 얼굴 내지는 피부 전체를 박박 갈아버리면 어떨까? 철 수세미 같은 걸로? 학교로 향하는 간선버스 안에서 모두가 나를, 내 얼굴을 흘깃거리거나 외면한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무력하다. 나는 벌벌 떨기 시작한다. 그들, 아니 내가 휩쓸린 여기의 풍경을 난사하고 싶다.
다행히도 나에겐 총에 근접하는 무기가 없고 온통 수치심뿐이다. 얼굴은 형상 차원에서 마감되지 않는다. 형상이 제각각 멀쩡해도 얼굴의 무른 질감은 순식간에 흘러내릴 수 있다. 그럼으로써 망가지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는 폭력적이다. 차라리 내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여러번 당기고 싶다. 못생긴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한 의지가 없다. 못생겨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는 후자인가? 내 얼굴은? 오늘도 무슨 핑계로 수업 시간을 마다한 채, 아무도 없는 계단참에서 나를 기다리는 거울의 매끄러운 표면에 고개를 처박는다. 나르키소스 신화 속 자기 얼굴에 홀린 시선을 무자비하게 꺾어 만든 가시덤불 속으로. 언제나 그곳은 좌우가 반전된다.
거울을 섣불리 깨고 싶지 않다. 자해의 흔적 따라 실금이 갈 뿐이다. 모두에게 잔인한 밤, 나는 내 얼굴을 샅샅이 훑는다. 나의 시선으로. 나는 나를 대상화한다. 단언컨대, 주체는 미적으로 추하다. 나는 주체로서 내가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 아니 청중 앞에서 너덜거리고 있다.
22.
어느새 멍청한 금발이 된 나를 위한 립서비스. “연예인 누구 닮으신 것 같아요.”
23.
오늘 밤 나와 섹스하기 위해 아첨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얼굴에 (성적으로) 끌린다. 과장을 일삼는 제스처, 립서비스, 질투와 호기심, 포켓 거울 꺼내서 화장을 고치는 사람, 파운데이션, 가늘게 치켜세운 검정 아이라인, 블러 처리된 흉터 자국, 실패한 농담, 파우치 속 수선 도구들, 패브릭의 질감, 나의 어깨를 무심코 쓰다듬는 손길, 가벼운 스킨십, 옷깃에 묻은 립스틱 자국 문지르다 우리의 시선이 교차하는 사이 잦아든 대화, 뜬금없는 침묵에 홀린듯 조용히 건배하는 사람들을 모른 체하며 나의 뒷모습 따라 무슨 선술집의 어지러운 계단 내려오다 마주친 낯선 일행의 수동 공격적인 의심 따위 저버리는 단호한 발걸음, 싸구려 모텔 네온사인 아래 포옹하는 두 사람, 우리 사이엔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는 결론 내리고 주차장 방수 커튼 걷자 드러난 비상구로 묵묵히 사라진다. 그들이 각자 동요하는 순간. 취기로 고조된 오르가슴.
24.
비닐봉지를 벗었을 때,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이 아닌 환호성. 극적인 미사여구.
25.
내가 응시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 얼굴은 (주체적인) 나에게로 잦아든다. 그 사실을 깨닫자 홍조는 기적과도 같이 사라졌다. 오늘을 위해 기도합시다. 아멘. 참고로 외모 강박증은 신체 이형 장애라고도 불린다. 나를 둘러싼 불특정 다수에게 느낀 적의는 섹스 불감증이 아니다.
26.
주변화된 도시를, 나의 경험을 빌어 서울 어딘가를 헤맨다. 서울에서 시작해 다시 서울로 수렴되는. 복잡한 미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책을 싫어한다. 걸으면서, 걷기 위해 사색하지 않는다. 모든 경로에는 목적지가 필요하다. 문제는 목적지를 선택해도 결국 헤맨다는 사실이다. 내비게이션은 멀쩡하다. 기기마다 다르겠지만, 하여튼 자체적으로 최단 거리를 연산해서 여기 아닌 곳으로 이끈다. 내가 승차한 택시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공모자에 가깝다. 어떻게 무슨 근거로 최단인가? 자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차창으로 스치는, 나처럼 정처 없는 사람들. 그들을 일일이 셈하기엔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 수치화할 수 없는 전부. 혹은 인파로 잦아든 채, 상호 작용하지 않는 무수한 점들.
우리에게 신호를 발산하는, 그럼으로써 우리가 공유하는 신호의 근원은 무엇인가? 어디인가?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인공위성. 우주에 떠 있는 민간용 항법 장치들. 너무 멀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불가해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내가 헤매는 이유,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실시간으로 매핑된 세계, 그중에서도 서울의 구체적 지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해야 한다. 목적지와 무관하게. 사실 알아챌 필요가 없다. 사이드미러로 소실되는 풍경을 본다. 사실 보지 않지만, 그래도 보기로 작정하면 볼 수 있다. 모든 풍경은 창문이다. 외부에 드리운 이미지의 잔상이자, 어쩌면 외부 그 자체다. 나는 외부로 투신할 수 없다. 술에 취해서 밤새 흐느끼다 올라간 아파트 옥상의 난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친구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 “더 이상 내일이 기대되지 않아.”) 극적인 순간, 나의 시야를 가로막는 창문을 여는 데 실패하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자유 낙하하는 중이다. 물론 시체 같은 건 없다.
그보다 앞서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 사람은 나를 초월하므로, 그의 상징적인 죽음을 실감했다. 오로지 신호에 의지해서. 점들을 매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뒤늦게, 몇 초의 시차를 두고 상상하면서. 서울 어딘가에 남은 불길한 싱크홀. 그것은 또 다른 싱크홀의 전조다. 신호가 결렬되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존재 자체가, 모든 인기척이 사라진다. 그 자리와 더불어.
그 자리를 우회하면서 걷는다. 혹은 택시를 타고 주행한다. 내가 서울 어딘가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 사실만으로 서울은 파국의 현장이다. 애초에 서울은 지정학적 공간이 아니다. 제아무리 3D 모델링을 반복해도, 공간으로서 균질하다. 혹은 거실의 바닥처럼 납작하게 고르다. 주변 사람들 중 누구도 모나거나 꺼진 자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죽음을 부르는 무덤이다. 각지의 무덤 위로 첨탑이 생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무슨 오피스텔이 생긴다. 내가 과거에 살았던, 우리 가족이 염가로 처분한 아파트가 늘어선 단지가 생기고, 분양권 선두를 차지하려는 성가신 도박꾼, 아니 시민들이 꼬리를 문다. 사실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건 행정적으로 처리된 불운과 그로 인한 체념과 “자유의지”를 두른 펜스, 계급적인 방벽으로 귀결된다. 금세 각자가 기억하는 위치로 흩어진다. 서로 저주하면서. 골목이 굽이치고, 나는 그들을 탐문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모욕당한 얼굴을 골목 끝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다.
그들에겐 실체가 없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27.
서현석의 <헤테로토피아>는 을지로3가역 5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관객이 사전 고지된 번호를 따라 다이얼 누르면, 서울의 비/공식적인 역사가 주변에 도사린 풍경 속 굽이치는 골목마다 각색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1968년, 무슨 행정 전문가들이 꾸민 도시 계획 하에 주변의 판자촌을 쓸어버리고 말 그대로 솟아오른 세운상가를 둘러싼 추문들. 또 다른 첨탑. 그것이 꿈꾼 “미래의 유토피아”는, 어느새 8층 계단참을 지나 옥상에 다다른 관객의 시야 속에서 완전히 무산되기에 이른다.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려 애쓰지만,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28.
내가 기억하는 순간은 무엇인가? 어쩌면 미술이 대신할 수 있다.
다시 정각에 다다른 기상 알람이 울리기 전에, 나는 전시장으로 간다.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서울 어딘가를 헤매는 중이다. 혹은 도착을 유보한다. 실제로 그 당시의 전시장, 즉 신생공간으로 향하는 언덕은 대체로 가파르다. 임대료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느 구석진 동네에서 방치되다시피 한, 미술과는 거리가 먼 반지하나 옥탑, 개인 작업실 등을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곳으로의 여정은 도심을 순환시키기 위한 경로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 사용자 편의적이지 않다. 고작 4G에 불과한 데이터의 가속도에 자꾸만 뒤처진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례적인) 산책하는 기분으로, 지도 위를 걷는다. 하나의 점으로서 시야를 확보한다. 주변 풍경이 해상도 차원에서 현실처럼 재/구성된다. 어디선가 픽셀이 튀는 소리. 어느 순간부터 현실의 중력이 성가시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체력에 부친다는 의미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존재는 전지적이지 않다. 방금 주머니에서 꺼내든 스마트폰 액정에 반사된 나의 얼굴일 뿐이다.
계속 걷다 보면, 지도는 음영으로 처리된다. 음영이 짙어질수록 언덕이 가파르다. 그렇다. 바야흐로 2015년 5월, 나는 지금 “을지로”가 아닌 종로구 창신동에 위치한 ‘지금 여기’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주로 다루는 매체는 사진인데, 블랙 미러로 만든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어스름한 공간 속에서 마주친 작업은 여기의 조도에 걸맞는 무슨 동굴 사진이다. 김익현의 작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디 나의 기억이 적중하기를.) 그 작업은 일상적으로 촬영한 스냅Snap이 아니다. 동굴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암시하는 바, 작가는 짐짓 고고학자의 태도로 ‘그곳’을 탐사하면서 돌과 바위에 새긴 음각처럼 두드러진 내벽을 샅샅이 기록한다. 문제는 그 결과가 인화지에 출력된 채, 동굴 속 풍경과 그곳에 드리운 납작한 이미지 사이의 표면 장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사진을 통해 비/가시화된 미묘한 질감을,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로 샅샅이 기록한다. 김익현으로 추정되는 작가와 달리 스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집으로, 이번에는 h와 함께 살고 있는 거실 딸린 투룸으로 돌아가, 바로 그 순간을 글로 써야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모든 글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방위하게 유통될 것이다.
블랙 미러를 밀치면서 전시장 밖으로 나온다. 햇빛의 조도 때문에 순간 눈이 쨍하다. 어디서도 알람은 울리지 않는다. 사실 ‘지금 여기’는 그곳에 없다. 아니, 그곳을 비롯해 2015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모든 신생공간이 자취를 감췄다. 사라졌다. 더 큰 문제는 내가 그 당시에 사용하던 아이폰 6플러스를 여느 때와 같이 만취해서 비틀거리는 사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갈수록 고조된다. 나는 한 번도 외장하드를 사본 적이 없다. 클라우드에 마지막으로 자료를 업로드했던 게 무슨 졸업 전시 때였나? 무수한 스냅들은 아직까지도 구천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역사는 싸구려다. 나에겐 ‘그것’으로 기록할 의무가 없다.
29.
2017.01.13
신생공간을 아카이브하는 ‘엮는자’의 2015년 하반기 포스팅에 따르면, 그 당시 서울에는 총 27개의 전시장이 존재했다. 그러나 27이라는 숫자는 유동적이다. 가장 최근의 신생공간 목록에 포함된 전시장은 총 24곳, 그 사이에 개관한 공간 몇 개가 오래전 자취를 감춘 공간들을 대신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자연스러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신생공간인가? 애초에 그 모든 전시장을 ‘신생’으로 솎아내는 게 비평적으로 타당한가?
잘 모르겠다. 기준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사실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이 SNS에서 언급되기 전부터, 혹은 그보다 먼 과거에 이르기까지 신생공간에 대한 공적인 합의는 계속 불발됐다. 문제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신생공간은 ‘그것’을 전시장이나 가설 무대로 운영하는 당사자들과 그들이 서로 맺고 있는 이해관계와 무관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의 정황은 외부, 즉 이슈 거리를 수소문하기 위해 떠도는 저널이나 비평가들에 의해 (신생공간으로) 대상화된 결과인가? 이때의 외부는 정확히 무엇인가? 미심쩍은 가운데 최초의 발화자를 찾기 위한 시도가 이어졌지만, 기록으로 남을 성과는 없다. 임근준 평론가가 상봉동에 위치한 ‘교역소’에서의 무슨 강의를 매듭지으며, 국립현대미술관에 “청년관”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던 극적인 장면은, 그것의 타당성을 떠나 신생공간에 대한 예언 같은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일일이 짚어낼 수 없는 무수한 변수들이, 2015년 전후에서야 가시화된 새로운 미술의 지형도와 함께 머무른다. 그와 별개로 갈수록 명확해진 것은 반드시 ‘신생’이 아니더라도, 나와 같은 관객 시점에선 일련의 공간들이 뭔가 플랫폼처럼 체감된다는 이율 배반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신생공간이 미술계 속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정치적인 슬로건이 아니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은 1980년대생에 속한 청년 미술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거점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총합으로 묶이는 순간 과정상의 변수, 그로 인해 서로 변별되는 공간의 정체성과 운영 지침 및 조건들이 생략된다. (문제는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 아무도 해명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사실이다.) 당사자들은 공간 차원에서 이룬 독자적인 성취가 신생공간을 둘러싼 추문으로 희석될 것이란 우려로 소스라쳤다. 이는 사실 여부를 떠나, 신생공간으로 성황리에 문을 여닫은 2015년의 미술계를 발판 삼아 마침내 ‘여기’에서 각자도생하고 있는, 어느새 미술을 전업으로 삼는 ‘청년’들이 겪고 있는 외상후 스트레스의 전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는 더더욱 독자적으로, 신생공간을 포함한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은 채 성취할 것이다. 나의 개인 작업으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합의된 사안이 있다면, 개별 공간들이 SNS를 통해 전시와 관련된 정보를 유통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트래픽을 가속시켰다는 비평적 가설이다. 그럼으로써 혼선되는 정보 자체가 미술계의 (추문을 넘어선) 공론이 된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한때 공간 당사자가 비밀리에 간직했던 무슨 정체성은 데이터 차원에서 말 그대로 희석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다시 줌 아웃을 해보자. 우리는 ‘엮는자’의 목록과 별개로, 서울이라는 지정학적 토대 위에 산개한 공간들의 좌표와 그 사이의 여백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 전부를 선으로 잇거나 지역 단위로 분할하는 건 또 다른 갈등을 유도할 뿐이다. 신생공간을 찾아 떠난 관객들의 GPS는 서울에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줌 아웃과 그로 인한 조감의 시점만으로 신생공간이 공동으로 가설된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논증할 수 없다. 우리가 일련의 공간들을 신생공간으로 매개하기 위해선 선적인 연결이 아니라, 이미 조감된 화면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데이터의 역학을 새롭게 작도해야 한다. 어쩌다 ‘우리’는 신생공간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무슨 전시장에 관한 포스팅을 실시간으로 올리면서 미술에 관해, 말 그대로 떠들게 됐는가? 서로의 관객을 자처하면서 상봉동을 포함한 서울의 벽지와 벽지 사이를 지도 인터페이스에 의지한 채 무작정 가로지른 이유는? 신생공간의 피날레라고 할 수 있을 《굿-즈》(2015)가 80명의 참여 작가 및 팀들을 모으고, 그 수를 한참 선회하는 관객들을 굿즈의 형식으로 재/구성된 작업으로 환대했던 바로 그 순간을 돌이켜보건데, 그들은 모두 (당사자성을 떠나) 일시적으로나마 공동 의식 같은 걸 치르고 있었다. 물론 관객이자 비평가 나부랭이인 나도 마찬가지고.
실제로 당사자를 포함한 관객들 간에 이루어졌던, 그 당시의 타임라인 기준 걷잡을 수 없는 피드백은, 신생공간을 각기 다르게 과/소비한 경험을 SNS에서 다양한 맥락으로 공유하면서 동시성의 감각을 확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식의 선순환을 의도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개개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굿-즈》의 공동 기획자 중 누군가가 연계 토크에서 언급했듯, 피날레의 현장에선 초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벚꽃 같은 게 흩날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름 아닌 우리의 성취. 아니, 공동체. 신생공간 이후에 남겨진 24곳의 전시장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가속화된 각자도생을 무릅쓴 채 ‘그것’을 반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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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서울. 나는 모든 게 사라졌을 즈음에도 신생공간에 관해 쓰고 있다. 내가 (미술) 비평을 시작하게끔 유도한 미술의 정황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공동의 플랫폼”이 재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지만, 거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운 미술을 발명하는 일은,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아시다시피 나의 미술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역사의 사료들은 의미 그대로 경험 차원에서 실재하지 않는다. 할 포스터가 남긴 경구를 고쳐 쓰자면, 실재는 나에게로 귀환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 정신과 약을 삼킨 뒤 도파민 폭주에 시달리던 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순간을 발단 삼아, 이제 막 미술과 연루됐을 뿐이다. 사실 모든 것은, 미술에 대한 경험마저 우연찮은 사건에 불과하다. 나에겐 절망으로 치미는 현실을 파헤칠 권한이 필요했고, 그래서 무작정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그 결과물을 찌라시처럼 돌리다, 결국 덜미를 잡힌 것이다.
비평가로서의 자의식. 그건 나의 글을 매개로 스스로 체감하는 나에 대한 트래픽이고 ‘그것’을 가속하기 위한 원인이자 결과다. 인과관계에 따라, 나는 2015년 전후에 신생공간의 흐름에 편승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비평가가 됐다. 나는 현장에 있거나 없었지만, 언제나 현장 르포에 가까운 글을 썼다. 필사적으로. 혹은 처절하게. 그 당시의 글은 담배 냄새에 절어 있다. 문장을 고쳐 쓸 때마다, 비흡연자인 h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방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내가 어떻게 거기가 아닌 모든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했는지, 그런 의문은 비평적으로 합리화할 수 있다. 이를테면 “데이터의 역학”을 중요한 논점으로 짚으면서. 동세대 차원의 미술, 정확히 말하자면 “1980년대생에 속하는 청년 미술가들”이 주도하는 링크들의 관계와 그것이 추동하는 비/현실의 감각이 (각종 스마트 미디어를 매개로) 폭주하는 중이다. 개별 전시장은 밀실에서 벗어나 깨지거나 모난 링크로 분산된다. 그런 가설을 토대로 무슨 작업은 실시간의 데이터를 따라 무한하게, 때로는 영속적으로 흐르기를 바라거나, 데이터 자체로 널브러져 있다.
내 관점에서 ‘그것’은 익명의 다수, 즉 사용자user에게 말 그대로 유포되기 위한 과시적인 제스처처럼 보였다. 폄하의 의미가 아니다. 나 또한 스스로를 사용자로 규정했고 실제로 그랬으므로. 이번엔 당사자성의 원칙에 따라, 상호 간 합의가 가능한 작업 차원의 방법론이 존재했다. 이제 더 이상 모든 언덕과 그것이 지도상에 드리운 그래픽적인 음영을 오르내릴 필요가 없다. 나는 사용자로서, 일련의 전시 및 작업과 함께 이미 도처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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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는 그제야 막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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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인터넷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그것’을 멋대로 고쳐 쓴다. 포스트와 인터넷. 전자는 후자에 대한 결연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인터넷이 없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으므로. 와이파이 신호가 꺼지는 순간, 모두가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소한 서울에서 그럴 일은 드물다. 광섬유로 드리운 대역폭에 국한했을 때, 서울은 언제나 첨단의 도시다. 광섬유는 서울 속 우리가 걸치고 있는 일상의 레이어를, 최대한 남루하지 않게 직조하고 있다. 사실 지금도. 2024년 기준 내가 살고 있는 석계역 근처의 풀옵션 원룸에서 자체 해결할 수 있는 일상, 혹은 그것의 잔여는 거의 무한하다. 데이터는 모든 옵션들을 장악하고 있다. 물론 나에게 스마트 냉장고 같은 건 없지만, 나는 여기서 뭔가 복제양 돌리가 된 것 같은 좆 같은 기분을 느낀다. 여기 초월적으로 구획된 공간들, 생계형 오피스텔 건물 주변에 늘어선 재개발 단지, 자유의지, 자유롭지 않은 쇼윈도의 잔상들, 서로를 되비추며 움츠리는. 설사 그 와중에 어딘가가 모나거나 깨지더라도, 신호는 모든 곳에서 명멸하고 (시민권을 지닌) 사람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온갖 디바이스를 규정한다. ‘그것’의 위치를.
위치와 매개된 존재의 가치를. 나는 일개 시민으로서, 그 사실에 순응하는 편이다. 오늘의 스크린 타임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불/특정한 오후에 자체 전송된다. 참고로 오늘은 8시간 남짓 스마트폰을 사용했고, 아마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이후의 나날들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포스트와 인터넷, 인터넷과 포스트는 어떻게 연루되는가? 이제 나는 그 문제를 논증할 필요가 있다. 혼자서, 무엇보다 자의적으로. 내가 기록한 미술은, 미술에 관한 비평은 인지 부조화의 서사다. 2016년 3월에 「운석들」이라는 글을 썼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몇몇 작가에 대한 일종의 사례 연구에 가까웠다. 그들의 이름을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나를 모르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주변 선생님들이 SNS에서 그 글을 상찬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드디어 한국에서 이런 글이? 의도적인 과장을 보탠 것이다. 나는 사례로 든 작가들과 같은 세대로서, 미묘한 나이차가 있지만 하여튼 (신생공간으로 말미암은) 세대 교체를 위한 포석으로 기능했다. 새로운 글. 새로운 비평가. 고작 2016년이었으니, 신생공간의 여진이 아직 남아있다. 내가 미술계 속에서 상징자본을 유지 보수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왜 하필 ‘운석’인지? 이제 그 글은 광섬유 너머로 사라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운석의 정체를 (자의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운석을 둘러싼 작업 차원의 정황을 부풀릴 수 있다. 이를테면 사용자는 사용자로서 현실을 대면한다. 그러나 몰입하지 않는다. 양자 사이에는 일종의 창문 내지는 “유리 벽”이 있다.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표면으로서. “유리 벽”을 깰 수 있을까? 그 너머에 있는 현실로 투신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제 ‘그것’은 물리적이지 않다. 현실이 사용자 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에게 엄습하는 인지 부조화. 즉 현실은 독해 불가능한 이미지이고, 이미지를 현전하게 만드는 알고리즘의 기술 체계는 직관적이지 않으며, 그럼에도 사용자 개인은 직관에 따라 현실을 대면한다. 그런 식의 서사를 내면화한 채, 지금 여기로 매번 다르게 도착하는 운석 같은 작업들과 마주치는 것.
운석은 지금 여기, 2015년 전후에 머무른 서울에 대한 알레고리적 객체다. 나를 대신해 창문으로 여과된, 그러나 이미지도 (칸트의 인식론에 따르자면) 물자체도 아닌 무언가다. 웹에서 무작위로 발췌한 무슨 이미지가, 마찬가지로 무작위하게 자신의 단층을 3D 프린터기로 쌓아올린 채 여기에 놓여있다. 일민미술관 3층에서 맞닥뜨린 박아람의 작업, <운석들>(2015)과 같이. 나는 ‘그것’의 정확한 출처가 궁금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해명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나를 심문한다. 나의 존재를. 과거에, 그 이후에도 반복될 출처 모를 죽음을. 스크린에서 벗어나는 순간, 운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물성을 지닌 채, 그 이유만으로 갈수록 자기 부정에 휘말린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게 바로 내가 포스트 인터넷을 직역할 수 없는 이유다. 포스트 인터넷은 개념이 아니라 단어다. 시적인 비유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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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시적인 비유에 저항했다. ‘나’라는 주어를 심문하지 않음으로써. 모름지기 비평가에겐 단어가 아닌 개념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납득한 채, 단어를 개념인 것처럼 말했다. 창문을 창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즉 창문은 인터페이스다. 사용자와 온전히 동기화되지 않는 액정의 표면이다. 액정 안팎에서 고립된 사용자는 불능감에 시달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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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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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언제나 어둡다. 커튼을 젖힐 필요가 없으므로. 글을 끄적이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든 기운다. 알람은 울리지 않는다. 이미 정각이 지났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갈수록 초조해진다. 이제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스스로 증명할 것인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나의 모습은 희박하다. 희박해진다. 노트북 모니터의 불빛이 드리운 낯선 얼굴. 자판들 사이를 헤매다가 거의 넋이 나갔다. 이번엔 복제양이 아니라, 무슨 유령 작가가 된 기분이다. 수명이 줄고 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좆 같은 기분을 무릅쓴 채, 담배에 습관적으로 불을 붙인다.
오래전에 아파트를, 묵동 월드메르디앙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141세대 중 하나였다. 한 세대는 부동산 매매를 통해 다른 세대로 교체된다. 수요 공급의 원칙이 적나라해지는 순간. 부모님은 끝내 이혼했고, 모든 건 절차에 따라 순조로웠다. 법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정해진 사건이었다. 아파트로 이사하기 전부터 부모님의 사이는 소원했다. 그들은 각방을 썼고,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나는 그 이유를 캐묻지도 않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너희 아빠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냥 서로 (막연하게) 안 맞는 부분이 있었던 거지. 어쩌다 엄마한테 그런 말을 듣게 됐을까? 내가 먼저 가족에 대한 얘기로 물꼬를 트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을 추궁하기엔, 내가 업계 차원에서 재/생산하고 싶은 글들, 아니 비평이 너무 수두룩하다. 엄마의 말은 푸념에 가까웠다. 별다른 어조가 없는 목소리.
“그런데 너희 아빠는 왜 이렇게 운이 없니.”
우리는 그냥 세대 구성원이었다. 중산층이 되기 위한 욕망이 노골적이지 않았다. 서울 벽지에서 그보다 여건이 나은 여기까지 왔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단조로운 일상. 그래서 서로 무관심한. 심지어 아파트에서, 내가 차지한 방에 틀어박혀 담배를 내리 피워도 군말이 없었다.
가족의 내력을 모르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는 것. 그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부모님에 의해, 가족으로 말미암아 방치된 적이 없다. 다만 갓 중학생이 됐을 무렵 부모님은 여느 가족과 다름없이 맞벌이를 시작했고, 방과 후의 집은 대체로 적막했다. 아파트 직전에 거주한 무슨 빌라의 2층은, 늦은 저녁까지 나의 영역이었다. 복층 구조의 기이한 건물. 협소하고 가파른 계단. 그 동네에서 무슨 소굴로 삼기 위한 필요조건을 갖춘 셈이다. 집 바로 근처에는 어느 벙어리 할머니가 운영하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거기에서 담배와 술을 샀다. 아빠의 외투를 대충 훔쳐 입고 어른인 척 굴었다. 주변 친구들, 나의 기억 속에서 호모 소셜의 근원이라고 할만한 그들이 여기로 모여들었다. 다행히도 부모님은 그들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동네의 이름은 수유리다. 수유리와 묵동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계속 미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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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혼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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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가족과 함께 외갓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부모님은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슨 각별한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성수동으로 터덜거리며 굴러가는 (아직 체어맨이 아닌) 차 안은 대체로 적막했다. 아니면 무슨 라디오 방송을 틀었을 수도. 실제로 외갓집은 성수동에 있었고, 그건 일종의 관용어가 됐다. 외갓집의 이름은 ‘성수동’이다. 엄마는 나에게 오늘이나 내일 ‘성수동’에 간다고 일러줬고, 나는 거기가 어딘지 바로 알아차렸다.
다소 기이한 일이다. 지금의 성수동은 엄마나 내가 중얼거린 ‘성수동’과 어조가 다르다. 엄마가 카페를 차렸던 성수동과도 다르다. 나는 그 세 가지 이름 사이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지 잘 모른다.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으므로. 다만 이렇게 추측할 수는 있다. 그 당시에 ‘성수동’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와 사촌들이 사는 2층 구조의 독립 주택이었고, 그래서 엄마에게 친숙한 이름이자 동네였을 것이다. 엄마의 카페는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 엄마의 카페는 거기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사실 문을 닫지 않았어도, 이명박 정권 이후로 손바닥 뒤집듯 계속 갈아엎는 도시 계획안에 휩쓸린 채, 주변과 함께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엄마가 폐업 직전까지 내몰린 시기는 2012년 무렵, 성수동이 “수제화 특구”로 지정됐을 때와 맞물린다. 오래전부터 맞춤형 구두를 만들었던 장인들이 지역 활성화를 위한, 나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인 모델로 뉴스 지면을 오르내렸다. 물론 그들이 정성스레 마름질한 역사는 2024년 기준, 데이트 코스를 위한 빈티지 미감의 카페 거리에 쓸려나간 지 오래다.
나의 유년 시절은 그보다 한참 과거에 있다. 나는 1992년 9월 서울 모처에서 태어났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기 2년 전이고, 노태우 정권의 말미다.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조만간 문민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의 정황은 내 기억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난다. 그 당시의 서울은 역시나 흑백으로 인화된 사진에 가깝다. 이미 대문자 역사로 처리된 낡고 퀴퀴한 사료들이다. 문민정부 아래서, 우리 가족은 가난했고, 민주화 슬로건이 어떤 식으로 가족의 가난한 사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할 겨를이 없다. 3저 호황에도 불구하고, 사실 변화의 굴곡은 단조롭기만 하다. 민주주의 치하에서 우리에게 배당된 것은 계급 도약을 위한 경제적 토큰이 아니라, 양당제에서 갈피를 잃은, 대선이나 총선을 앞두고 펼쳐지는 100분 토론과 같은 쇼 비즈니스로 날조된 무슨 투표권에 그친다. 한때의 애청자로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성수동’은 조금 다르다. 그 이름으로부터 연상되는 몇 가지 장면들은, 물론 해상도는 낮지만, 나의 기억으로 유동하기 시작한다. 가전용 캠코더로 찍고, VHS로 저장된 영상 같은 것이다. 영상의 릴은 어떻게든 돌아간다. 실제로 국내에 캠코더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참고로 제주도로 떠난 (마지막일 수도 있는) 1박 2일 가족 여행에서 아빠가 남긴 핸드헬드 영상 중에는 UFO가 하늘을 스치는 장면도 포함돼 있다. “믿거나 말거나.”
명절이 아니어도 ‘성수동’에 방문할 때마다 명절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촌들은 잔치 음식들을 늘어놓고 술을 마셨다. 모든 자리는 좌식이었다. 1층에는 외삼촌 식구가 살았고, 잔치는 2층에 있는 외할머니 안방에서 벌어졌다. 소음의 마지노선은 적정 수준이다. 사람들로, 나의 사촌들로 북적거릴 뿐이다. 둘째 사촌 누나는 유독 나를 각별하게 여겼다. 거의 열 살 터울이다. 엄마가 일러준바, 나를 보기 위해서 ‘성수동’이 아닌 우리 집에 종종 들렀다. 그때도 지금도 가깝지 않은 거리다. 나는 누나가 좋았다. 누나가 나랑 놀아주는 게 좋았다. 누나에게 놀자고 보채기도 했을 것이다. 누나와 외숙모가 무슨 전을 부치고, 만두를 빚는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엉성하게 빚은 만두가 무슨 장식처럼 진열됐다. 아무도 그걸 집어 먹지는 않았지만.
외가의 가계도 차원에서 나는 장남이 아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친가 쪽 식구들과 다르게, 매년 호화로운 제사를 치르면서 유교 질서를 내면화한 사촌들은, 무엇보다 누나는 왜 나를 좋아했을까? 무엇보다 누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른이었을까? 그 질문과 맞닥뜨리면, 릴은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환대받은 내가 징그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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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떠났다. 내가 스무 살 무렵의 일이다. 미국 어디에 처음으로 정착했을까? 지금은 무슨 주에 살고 있지? 가족 명의로 된 폴더폰을 구입한 이후에도, 누나와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 왜냐하면 누나가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가족이 ‘성수동’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녹슨 철제 대문을 밀치고, 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나를 부르는 앳된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은 온전히 떠올릴 수 없는.
‘성수동’과 관련된 마지막 기억 속에서, 누나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뭔가 준비를 하고 있다. 서울을 떠날 준비. 어쩌면 자기 가족, 부모님과 절연하기 위한 준비.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나는 이제야 짐작할 수 있다. 누나는 독립적인 사람이다. 여러모로. 외가 중에 유일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 무슨 일로 보채는 어린 나의 손을 붙잡고 들어선 성당 구석진 자리에서 조용히 성호를 긋는 모습. 대들보 근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정교한 문양. 아무도, 사실 나조차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지하철 타고 몇 번인가 환승해서 나를 찾아왔고, 우리 가족의 기척이 들리면 어김없이 2층으로 올라와 나를 환대했던 낯선 누군가. 그 사람을 따라 어색하게 성호를 긋는 척한다. 주변에 울리는 찬송가, 아니 내가 모르는 오르골 반주를 듣는다. 나는 더 이상 보채지도 울지도 않는다. 2층에 자리한 작은 현관에는 도자로 만든 화분 몇 개가 널려 있었다. 언젠가 그것들 중 하나, 아니면 전부가 깨졌을 것이다. 당황하지 않고 도자 파편들을 슬리퍼로 분지른다. 누나가 원했기 때문에. 누나는 나처럼 떨지 않는다. 자신의 계획대로, 여기 아닌 곳에서 다시 자라날 미래를 기약하며, 꾸역꾸역 현관 바닥을 쓸고 헤친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사라진다. 더 이상의 잔치는 없다. 아니, 없을 것이다.
39.
인기척이 잦아든 거실, 텔레비전 소음으로 텅 빈 구석구석을 채웠던 여기에 누나가 나와 함께 있기를 바랐다. 염치가 없긴 하지만, 언젠가 주눅 든 고개를 들어 마주할 수 있을지도.
40.
내가 흐느낄 수 있다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누나, 나는 어른이 되기 전에 이대로 뒈질 거야. 무기한 미룬 답장의 서두는 그렇게 시작된다. 안부를 묻기 전에, 지금의 나를 초래한 모든 일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털어놓을 것이다. 서울에서, 현실로 자꾸만 치미는 절망을.
그 얘기를 서울 아닌 곳에서, 서울보다 늦거나 이른 시간에 읽고 있는 뒷모습이 차분하다.
41.
주변 사람들이 나를, 내 얼굴을 보고 있다. 그 이후에 도래할 자기 혐오의 복선처럼. 문제는 내가 아직 수치스럽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수치심을 겨누기 위한 방아쇠가 없다. 다만 시선을 의식하는 법을 깨우친다. 나를 주목하는 바로 그 순간, 도파민 수치는 빠르고 자연스럽게 누그러진다. 그들, 아니 나에게 사로잡힌 모두를 향해 자비로운 무관심을 보내면서. 그렇다. 그때의 나는 거만하지 않다.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무대에 오르기를 마다한다.
중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다.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여자애가 나를 점찍었고, 그게 모든 사건의 발단이다. 너는 이제 내 거야. 나는 마르고 창백했다. 대체로 선이 가늘었다. 피사체가 되기에 충분했다. 나를 흘깃거리는 시선의 주체는 대체로 여자였다. 나를 촬영한 사진이 유포되고, 거기엔 비밀 댓글의 타래가 이어졌다. 내가 파헤칠 수 없는 나에 대한 소문들. 그러나 소문은 금세 환호성으로 들려온다. 대다수가 이제 막 2차 성징에 접어들었다. 예기치 않은 몸의 변화와 함께 성적인 욕망과 불신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선 그게 별로 은밀하지 않다. 나와 너는 서로를 따먹는다. 물론 서로가 일일이 납득할 수 있는 극적인 합의는 없다.
그 나이에, 그 동네에서 체감한 이성애 규범은 적나라하다. 내가 선처럼 가늘기만 했다면, 그래서 나를 둘러싼 시선에 굴복했다면, 아마 남자들한테 머리채를 잡힌 채 화장실 칸막이나 뒷골목으로 질질 끌려갔을 것이다. 호모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호모 새끼’라는 이유로. 그 대신 나는 갈수록 음담패설을 나누는 법을 깨우쳤다. 그건 남자로서의 권위를 지들끼리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누구랑 섹스하고 싶어? 섹스해봤어? 존나 걸레 같은 년들.
첫 여름방학 동안에는 외출이 드물었다. 거의 집에만 있었다. 커튼을 젖히면, 날씨와 무관하게 주변이 화창했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주택 단지의 담장 너머에서 무슨 가로수 잎들이 우거졌다. 가끔 담장 사이에 들어선 언덕길을 걸으면 숨이 트였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서 7년 남짓 살았다. 그리 여유롭진 않았지만, 나와 동생을 포함한 핵가족의 구성원이 살기에 썩 나쁘지 않은 주거 환경이었다. 사실 나는 그곳이, 그 동네가 좋았다. 집과 바깥의 풍경이 적당히 어우러질 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인사를 나눴던 유일한 장소로 남아있다. 어쩌다 산책도 했는데, 모든 길이 집으로 이어졌다. 아직 친구가 아닌, 그럴 필요가 없는 누구들이 보내는 SMS에 어색한 이모티콘으로 둘러댔다. 침대 맡에 어디서 대여한 만화책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아빠는 가끔 나와 키를 쟀지만, 그러려니 했다. 관절 이음매가 조금 헐거워진 느낌이 들긴 했다. 주방 선반이 갈수록 낮아졌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주변의 환호성이 이전과 다른 느낌으로 웅성거렸다. 그 사이에 키가 10센티미터 남짓 자란 것이다. 이목을 끌기 위해서.
42.
모든 상황이 아귀가 들어맞는 순간이 있다. 그때가 바로 그랬다.
좁고 후미진 동네, 몇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 불법 포르노, 데이터 요금제와 폰 카메라 같은 것들. 복도를 지날 때마다 플래시가 터졌다. 나는 피사체였고, 누군가의 섹스 파트너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기를 바랐다. 아니, 욕망했다. 소문이 앞으로도 무성하기를.
43.
소문의 당사자로서, 나는 소문들과 어울린다. 그게 전부인가? 철컹거리는 셔터를 내리면, 우리는 순식간에 없어질까? 무관심한 표정으로? 그 전에 나의 손은 더 집요하게 매달리고 싶다. 교복 옷자락을 당기는 대신, 너를 바닥으로 내치는 것이다. 뒤이어 모욕할 것이다. 물리적으로 박살 날 때까지. 시적인 비유가 아니다. 여기에서 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너는 그 여자애를 강간했다. 나에게 돌아온 순서대로, 이번엔 내가 그늘진 안방의 문턱을 넘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애의 얼굴을 봤다. 공포로 어수선한. 나는 그 공포가 무엇인지 모른다.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것’과 연루되고 싶지 않다. 눈치를 보다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다. 한쪽 전구가 나간 백열등이 윙윙거린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적나라하다. 너는 호모 새끼의 뺨을 때린다. 호모 새끼가 나를 뒤에서 껴안는다.
사지로 내몰린 날벌레처럼 잔뜩 움츠리자, 너의 손은 잦아든다. 내 얼굴에 간 실금을 기웃거린다. “호모 새끼, 이 호모 새끼야.” 몇 번이고, 어쩌면 오늘이 저물 때까지 되풀이한다. 그렇다. 이건 시로 날조된 내용이다. 나는 사실을 맹세한 적이 없다. 그때를 (사적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때의 내가 모욕적이다. 아니, 고작해야 나 혼자만을 스스로 모욕할 뿐이다.
44.
그 여자애는 누구도, 아무것도 대변하지 않는다. 너의 이름을 나 혼자서 중얼거릴 뿐.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가 무슨 동창회에서 만나게 될 것이므로. 어쩌다 친구로 지낼 수 있었는지, 그날은 취해서 몸이 자꾸만 기운다. 늦은 저녁까지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더 이상 교복 차림이 아닌 주변 사람들이 어색했다. 나에게 돌아오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엉터리가 됐다. 충무로 현장에서 여러모로 갈리고 있었다. 오래전 그날, 여기에 없는 누군가가 다스리던 무슨 소굴은 시덥잖은 안주조차 못됐다. 내가 알아차린 너도 누구보다 태연해 보였다. 그래야만 했거나. 너의 이름은 앞으로도 비밀로 남을 것이다. 너에 관한 모든 것들이.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수유역 부근의 프랜차이즈 카페에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주로 연애 얘기를 했다. 너는 누구를 꼬시는 중인데 잘 안 된다고, 나의 경우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지 오래다. 그냥 비싸게 구네, 대꾸한다. 최선을 다해 웃으면서. 네가 꼬시는 남자가, 그 사람한테 줄줄이 달린 조건들의 목록이 궁금하지 않다. 서로를 추궁하는 척 연기할 뿐. 그렇다. 모든 게 비밀로 남았고, 어쩌면 우리 둘은 그 사실에 사로잡힌 채, 여기에서 처음 약속을 잡았을지도. 커피를 다 마시고도 한참 떠든다. 일주일에 한두 번, 내가 누릴 수 있는 일상은 그게 전부였다. 여기 아닌 곳으로 외출할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왜 하냐고 물었을 때, 이번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방 촬영을 마친 직후라 온몸이 너덜거렸다. 담배가 동났다. 갈수록 연락이 드물어졌다. 너는 그 사람 말고 다른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고, 나는 다시 영화나 드라마 현장에 불려 나갔다. 그러나 가끔 페이스북은 몇 년 전의 오늘을 알려준다. 함께 공유한 위치, 아니 서로의 이름이 태그된 그곳을.
2011년 11월 13일, 탐앤탐스 수유역점.
극적인 미사여구는 없다. 그냥 어쩌다, 이렇게 됐을 뿐이다. 너는 최근에 자살했다.
45.
전시장에 가고 싶지 않았다.
46.
보낸 사람
권시우 shakingjoe@naver.com
2023년 5월 1일 (월) 오전 10:59
어제는 사진 촬영을 무사히 마쳤고, 덕분에 일련의 작업들이 본 전시와 말 그대로 연루돼 있는 장면을 세세하게 기록한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놓입니다. 사실 연루의 감각은 작업으로만 한정할 수 없겠죠. 저로서는 현장에서 분주하게 고민하고 움직이던 모두가, 각자의 역할에 몰두할 때조차 전시라는 형식을 빌려, 함께 어떤 공유지를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간 비평가로서, 다른 전시들에 관해 썼을 때는 과감하게 생략한, 혹은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생소하기도 하고, 그래서 앞으로 최대한 각별하게 간직하고 싶습니다. 도록이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지금부터 뭐라도 뒤적거리고 싶어요.
사실 계속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게 돼요. 기억이 조금 막연하지만, 농담 반으로 제가 현장에서 분주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죠. 비평가로서의 무슨 권위 같은 걸 의식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실시간의 분주함에 저의 몸을 실었던 경험이 부족해서, 의도치 않게 제가 뚝딱거리게 된다면, 작가분들에게 최대한 조력하겠다는 약속이 너무 초라해지지 않을까 혼자서 염려가 됐습니다. 그런 염려를 자발적으로 하게 된 경험도, 그간의 비평이나 글들에선 미처 옮기지 못한 문장이었습니다. 저는 문장으로 숙고하는 버릇이 있고, 그게 제가 미술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식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현장에 다다르기 위해 함께 나눴던 얘기가 전시로 무사히 구현돼서 다행이고, 아직은 저 혼자서만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전시가 개막되면, 제가 아닌 관객들이 본 전시에 어떤 식으로든 화답하거나, 그러기를 마다하겠죠. 그런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으로, 제가 잠깐 머물렀던 공유지를 메일로나마 옮겨 적고 싶었습니다. 분명 리플렛에 수록된 전시 관련한 글에서는 전시를 준비하는 게 뭔가 축제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들떴는데, 이제는 전시가 마냥 축제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이렇게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라니, 여러모로 쉽지가 않네요.) 혹은 축제가 아니어도 작가분들을 포함한 모두와 연루됐던 시간을, 언제든지 서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사족이지만, 며칠 전에 어린 시절 짧게나마 교유했던 지인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함께 숙고하느라, 전시 오프닝에 참석하기가 여러모로 주저됩니다. 참석의 여부는 전시를 공동으로 기획한 A씨와 한번 상의한 다음, 결정할 것 같아요. 내일의 날씨는 다소 흐리지만, 기우는 없다고 합니다. 모쪼록 전시장에서 각별하게 마주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소 장황해진 글을 이만 줄이겠습니다. 촬영한 사진은 조만간 공유 드라이브에 업로드할게요. 총총.
47.
나의 과거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맥락화하고 싶지 않다. 그럴 수가 없다. 애초에 나의 과거란 명제 자체가 의문이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서 비롯한 모든 단상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 사실을 기정으로 삼는다. 그러나 단상은 생각보다 자주 과거를 초월한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삽화가 아닌 것이다. 역사적인 자료로 색인 처리할 수도 없다. 나는 단상에 사로잡힌다. 단상이 스스로 증식하면서, 그 과정을 두서없이 펼쳐놓은 자리를 기웃거린다. 어느새 나는 ‘그곳’에 속해있다. 소셜 미디어에서 유포되는 바이럴 형식의 단상들은 다르다. 가짜 뉴스의 윤리성, 이를테면 탈진실을 초래하면서 사용자와 사용자가 아닌 개개인 모두를 사실적이지 않은 공황 상태에 빠뜨리는 시스템 구조를 심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스템은 너무 전방위하다. 우리는 그곳으로 유도당할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사용자 이전의 개인이 내면화한 윤리와 도덕 같은 근대적인 가치가 무마되는 순간.
그 순간들의 연쇄는 시스템 차원에서 폭주한다. 자기 윤리를 판단하기 위한 윤리적인 근거가 갈수록 부재한다. 다만 시스템의 배후에 있는 어떤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우상 파괴할 뿐이다. 우리의 우상은 누구인가? 서울 특정적인 환경에서, 서울을 잠식하는 음모론의 당사자는? 내가 태어난 이래로 몇 번이나 교체된 정권의 수뇌부를 일일이 거론할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이 반대하는 정치적인 세력, 그들이 (바이럴로 공세하기 위해) 세력으로 규정한, 그저 치외법권에서 자생하길 원하는 비/존재를 음모론에 휩싸인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상은 없다. 시스템은 한 개인이 주도하는 권력 기제가 아니다. 동시에 모두가 시스템의 공모자라는 자가 폭로는, 현실 정치의 가능성을 무기한 유보하는 냉소주의, 또 다른 음모론을 퍼뜨릴 뿐이다. 시스템과 별개로 서울은 실재한다. 우리 각자가 기억하는 허구 속에서. 우리는 여기가, 서울이 허구라고 직감한 채, 도저히 합의에 다다를 수 없는 각자의 서사 속으로 잦아들 수 있다. 그곳에서 당사자성에 따라, 자기만의 암송으로 운을 뗄 수 있다.
최소한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내가 기억하는 허구를 통해,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단상이 무작위하게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개개의 단상을 현재 시점으로 무릅쓰는 과정에서, 단상들은 서로 얽혀든다. 어떤 단상은 소외된다. 미끄러지고 불시에 깨진다. 혹은 의도적으로 놓쳐버린다. 그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순순히 노력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여기에 있다. 나는 여기에서 자생하고 증식하는 단상에 사로잡힌다. 마치 나의 시야에 드리운 불투명한 장막, 액정, 스크린 너머에 있는 것 같다. 허구 속에서, 내가 잦아든 서사로 말미암아 때로 자유롭다.
48.
액정에 반사된 낯선 얼굴. 아니, 얼굴들.
49.
디디에 에리봉. 그는 1953년 파리 교외 지역인 랭스에서 태어나, 지식인으로서 섹슈얼리티와 퀴어 정치학을 연구하면서 다수의 저작을 집필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서야 랭스로 되돌아간다. 랭스는 프랑스 노동계급에 대한 원천적인 기억을 대변한다. 그로부터 한참 비약하면, 이번엔 마크 피셔가 있다. 1968년 잉글랜드 레스터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글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영국에서 변천한, 지금도 잡다하게 변천하고 있는 펑크punk를 비롯한 온갖 하위문화의 장르를 섭렵하지만, 그것의 기저에는 1980년대 이전의 “잉글랜드”에 대한 애증의 관계가 존재한다. (내가 독자로서 헤아린 바로는 그렇다.) 그는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거나, 그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거기에 있다. 그가 동명의 저서에서 제시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은 후기 자본주의 속에서 자동화된 관료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주체의 형식을 다루는 동시에, 그 주체가 다시 머무를 수 있는 새로운 “잉글랜드”를 꿈꾼다.
그렇다. 나는 그들의 약력을 읽는 중이다. 시/공간의 차이를 무릅쓴 채, 그들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지식인으로서, 무슨 비평가로서 각자의 연구 활동에 몰두하면서도 무언가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을 토로하기 위한, 뭔가 실존적인 고향에 사로잡힌다. 랭스와 “잉글랜드”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허구 속에서 실재한다. 그들이 여전히 기억한다는 전제하에. 디디에 에리봉은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 계급 의식에 잠재된,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기억과 일시적으로 화해한다. 최소한 그러기를 선택한다. 마크 피셔는, 그의 약력에만 의존하자면, 201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우울증을 개인화하는 대신, 자본주의적 시스템에 사로잡힌 채, 말 그대로 무한 루프되는 노동의 일상에서 만연한,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적인 질병으로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서사를 재/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사적이지 않다. 여러모로.
정말 그런가? 당사자성의 원칙에 따라, 나는 마크 피셔와 그의 죽음을 둘러싼 추문을 단정할 수 없다. 아니, 그냥 잘 모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가 생전에 “잉글랜드”로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감할 뿐이다. 그게 개인이 내면화한 우울증과 죽음 충동에 실제로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와 상관없이, 그는 되돌아갈 곳을, 펑크와 더불어 전망했다.
50.
나에겐 계급 의식이 없다. 정치에 무관심한 특정한 세대, 이를테면 무슨 시덥잖은 청년의 말로일 수도 있다. 다만 신생공간과 마찬가지로 자문하게 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청년인가? 시기에 따라, 아니, 뭔가 새로워 보이는 정권이 들어서고, 그 당사자가 사회의 부조리를 강요하는 새롭지 않은 방식에 의해, 세대적인 지형은 미묘하게 바뀐다. 어딘가로 “짱돌”을 집어던질 법한 사이비 운동권. 빈곤의 상징. 정상 가족을 이루기 위한 모든 사회경제적 자본을 포기한 당사자들. 그럼으로써 욕망이 없는 불확실한 실체. 계급을 둘러싼 징후는 있지만, 아무도 계급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다. 계급은 늙어버린 이름이다. 세대론이 대신할 수 있다. 우리는 청년으로서 무의미한 세대 교체를 일삼는다. 후속과 선발 사이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가 머무는 ‘그곳’은 점이지대일 뿐이다. 자기 정체성을 투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우리는 청년으로서 장소성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달리 말해 랭스나 “잉글랜드”와 같은 고향이 없다. 언제나 빈곤을 무릅쓴 채로 여기, 나의 오피스텔 원룸에 (월세를 치르면서) 일시적으로 거주할 뿐이다. 여기는 풀옵션이다. 스마트하지 않은 냉장고와 세탁기, 난방 시설을 비롯한 최소한의 주거 시스템이 내장돼 있다. 내가 들인 가구는 고작해야 내 키에도 못 미치는 수납장과 이케아에서 주문한 스탠드 정도다. 무선 청소기도 있지만, 지금은 고장 났다. 계약서를 좀 살펴보면, 여기가 몇 제곱미터인지 알 수 있겠지만, 그냥 적당한 너비라고 생각하는 데 그친다. 나의 게으른 생활 반경을 초과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다를 게 없다.
과거와 미래를 장소로, 장소를 통해 담보할 수 없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의미가 없다. 장소가 아닌 여기에서, 다시 어스름한 천장을 바라본다. 커튼이 드리운 채, 하루가 몇 년처럼 지난다. 지나가고 있다. 내가 누구와 더불어 살고 있는지 자문하기 위해, 아니 그냥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뒤적거린다. 지도상에서 명멸하고 있는 하나의 점. 나는 점으로서, 매일 여기로 되돌아온다. 온갖 단상과 함께. 기억의 지리학은 불가능하다. 나에겐 되돌아갈 곳이 없다.
51.
“사실 나는 그곳이, 그 동네가 좋았다. 집과 바깥의 풍경이 적당히 어우러질 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인사를 나눴던 유일한 장소로 남아있다. 어쩌다 산책도 했는데, 모든 길이 집으로 이어졌다.” 첨언하자면, 한때 벤야민이 이끌린 산책자는, 아케이드 속에서 영원히 실종됐다.
52.
친구와 함께 적군파에 관한 영화를 봤다. 예상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각색한 프로파간다는 아니었다. 오히려 영화에 등장하는 적군파의 멤버들은 외딴 산속에 자리한 전초 기지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인간적으로, 추잡하게. 그들이 원한 것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혁명의 실천이었다. 그 계획을 위해 1970년대 초반 오사카와 도쿄 등지에서 무작위한 테러를 일삼는다. 아니, 테러리즘을 불사한다. 영화에선 그런 사건들이 일일이 재현되지 않는다. 사실상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자기들을 좇는 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가까스로 기어든 지금의 전초 기지, 즉 ‘아사마 산장’에서 인질을 사로잡은 채, 경찰 부대와 대치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 영화는 적군파 잔당이 지들끼리 좀 살아보겠다고 여기서 몸부림치는 과정을 어떻게 극적으로 소묘하고 있든, 싸구려에 가깝다. 한때의 시네필로서, 그렇게 단언하는 바이다. 영화가 끝나고, 14인치 모니터에서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기도 전에, 친구는 물었다.
“우리도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우리가 이렇게 된다고? 도대체 왜? 나는 차마 되묻지 못했다. 물론 고가도로 아래에 자리한 복층 원룸이 우리의 전초 기지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시다시피 거기서 비판 이론과 그것이 비판할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해 떠들었다. 대체로 술에 취했지만, 농담으로 버무리지 않은 말들도 더러 존재했다. 왜 하필 그 영화를 보기로 했는지, 그 이유는 자명해 보인다. 서로를 무슨 동지라고 불렀다. 미술은 서구에서 수입된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만국의 혁명을 통해 달성될 것이라고 믿으며. 물론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없다. 레닌은 생략하기로 했다. 우리의 미술이 당쟁으로 번지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졸업 이후에 우리는 실제로 갈등했다. 다행히 사제 폭탄과 같은 무기는 없었다. 몇몇 사람과 함께, 각자의 글을 투고하기 위한 웹진을 만들었을 뿐이다. 전부 학교 사람들로 구성된. 나와 친구의 글이 돋보였다. 유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사는 더 이상 마르크스가 아니었다. 친구가 『자본론』으로 미술을, 지금 서울 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생공간을 주축으로 한) 극적인 사건을 일일이 날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사람이 쓴 글을 비아냥거릴 수 있다. 논리의 허점을 짚는 대신, 그냥 맥락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나는 『자본론』을 읽은 적이 없다. 혁명이란 내가 미술로 접어들기 위한 발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학교에서 누렸던 대다수의 관계로부터 멀어졌다.
53.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54.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지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를 떠올리면서. “정치적인 대의를 휘갈긴 슬로건, 서로의 이마에 새긴 인터내셔널 가사.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본 적이 없다. 서로를 원망한 적이 없다. 악수하면서 손의 촉감을 의식한 적이 없고, 언제나 포옹은, 그것만큼은 고사한다. 자신이 섹스를 거절한다고 믿는다. 애무의 순간은 도래하지 않는다.”
55.
확성기로 고조된 얘기들은 언제나 권위적이다. 방금 창가를 노려보고 지나갔다.
56.
다시 약을, 나에게 독성으로 작용하리라 짐작되는 모든 걸 삼키면서, 창문 밖에서 여기로 지글거리는 낯선 목소리에 응대한다. 이번이 몇 번째인가? 스스로 되묻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확성기가 아닌 자동 녹음기로 되풀이되는 과일 장수의 판촉이 저물고 있다.
57.
물속으로 내려간다. 심연이 가파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기억에 의지해서 내가 시작한 자리, 의식의 수면 위로 다시 헤엄칠 것이다. 러닝타임이 흐른다. 예상했던 순간에 길을 잃는다. 숨이 가빠지는 불규칙한 리듬에 따라 호흡한다. 서로의 숨을 맞춘다. 주변 풍경이 울렁거리지만, 이 모든 건 해상도 차원에서 재/구성된 이미지일 뿐이다. 지루하다. 셔터 스피드보다 빠르게 스치는 잔상 효과. 감은 눈가에 그을린 빛의 얼룩들. 나는 떠오르는 중이다. 아니, 서서히 건져진다. 침수되기 이전의 바닥, 반듯하게 누운 지평선이 나를 기다린다. 더 이상 물살을 거스르지 않는다. 러닝타임은 계속 흐른다. 몇 분 몇 초가 되자 동요하는.
58.
2020.02.08
부유 탱크에서 훈련을 반복할수록 ‘나’는 일인칭 화자로서 스스로가 의심스럽다. 잠수 시뮬레이션의 경험이 ‘나’에게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픽셀로 이루어진 이미지 속 풍경 내지는 잔상들이 자꾸만 몸에 달라붙는다. 그 순간마다 현실 안팎을 동시에 점유했던 사용자user의 위상학적 감각을 잃어버린다. 혹은 그러기를 바란다. 어느새 잠수는 사용자도 일인칭 화자도 아닌 비/존재가 되기 위한 최후의 미션으로 주어진다. 혼란을 무릅쓴 채 다음과 같이 자문하는 것이다. ‘나’와 일인칭으로 바라보는 주체는 동질적인가? 서로 몰입할 수 있는가? 참고로 부유 탱크에 저장된 모든 경험은 송여름이라는 인물의 다이빙 기록이다. 끈질기게, 어쩌면 현실에 가깝게 자신의 몸으로 기록을 재현함으로써, ‘나’와 송여름의 시점은 갈수록 혼선된다.
송여름은 다이빙을 하다 수중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애초의 목표는 바로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제 그녀를 대신하는 ‘나’에게 그녀는 죽음 이후에도 현전한다. 자신이 모르는 타자를 통해. 혹은 타자의 감각으로서. 누구와 매개된 것인지 불확실한 일인칭에 의지한 채 수중을 떠돌면서,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응하는 “없는 몸”은 처절하게 ‘나’를 부정한다. 문제는 그조차 송여름이 체감했던 경험 내지는 실시간의 기록을 재현한 결과라는 사실이고, 이로써 ‘나’는 부유 탱크를 넘어 그녀 자체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 일인칭은 ‘나’와 타자의 존재가 동기화된 시점, 그것으로 재편된 “없는 몸”의 감각을 대변한다. 개개인으로 분별할 수 없는, 거의 양성구유에 가까운 비/존재는 탱크에서 벗어난 현실에서도 지속된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익명의 여성으로 스와이핑swiping한 ‘나’의 얼굴. 그것을 되비추는 유리 거울. 무슨 컬트 집단이 성전으로 모시는 K-pop 안무. 틱톡을 포함한 온갖 챌린지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모든 순간이야말로 픽셀로 부서지는 부조리한 환상이라는 것을. 전원이 꺼지면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는 결렬되고,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수포로 돌린 주체성의 문제는 다시 현실의 ‘나’를 규정하기 위해 작동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현실은 무자비하다.
부유 탱크에서의 기록을 거슬러야만 도달할 수 있는 실존적인 트랜스. 우리는 거기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할까? 혹은 나가는 경로를 찾을 수 있을까? 나의 경우, 뭐라고 비평적으로 논증하기 전에 다시 (내가 확신할 수 없는) 현실로 잠수하게 될 것이라고 직감하면서, 어두운 전시장을 돌아 나왔다. 김희천의 <탱크>(2022)는 그런 식으로 관객을 사로잡다가 놓친다.
59.
깨어나자, 너의 무릎 위에 누워 있다. 주변은 사람들로 어수선하다. 대부분 미술 얘기를 하는 중이다. 그들이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여기로 초대했기 때문이다. 알거나 모르는 이름들을 선별한 뒤, 정성스럽게 리스트로 정리해서 초대 메일을 보냈다. 연말 파티를 기획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이 몇 년도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맞이할 새해도.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들. 색이 다채로운 알약들. 방은 언제나 그랬듯이 담배 연기로 자욱하다. 나는 너에게 묻는다. 사람들 얼마나 왔어? 어때, 좀 괜찮은 것 같아? 뭐라고 대꾸하는 대신 가만히 부드러운 손으로 나의 머리칼을 쓴다. 그 손길에 저항하면서 고개를 저을 때마다, 울 스타킹의 감촉이 느껴진다. 자꾸만 보풀이 엉키는 것 같다.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여기는 나의 집이니까. 잠자코 있지만, 그래도 나는 비평가다.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여기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속으로 올해의 미술을 결산할 계획을 세운다. 무슨 전시를 봤는데, 맞아, 저 여자는 허공에서 스타킹으로 자기 목을 맸어. 죽음까지 무릅쓴 거야. 그 전에 레이스가 달린 천 장식, 가위로 자른 섬세하고 작은 조각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벽에는 자기 유서가 적혀 있다. “미안해. 더 이상 내일이 기대되지 않아.” 시퍼런 글자로 눌러 썼지만, 끝내 잉크가 흘러내린다. 화장처럼 번지는 눈물. 수치스럽다. 내가 그녀, 아니 그녀의 작업을 무시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유포될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떠나갈 것이다. 다시 부드러운 손이 나의 머리칼을 쓴다. 너는 왜 여기에 있지? 초대한 적이 없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무심한 채 살았으니. 심지어 미술이니 뭐니 다 좆 같다고 생각하잖아. 그냥 나랑 무슨 카페의 창가 자리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는 헤비 스모커일 뿐.
방의 조도는 적당한 것 같다. 다시 너를 추궁하고 싶지만, 더 이상 말할 기력이 없다. 살짝 열린 방문 틈새에서 형광등 불빛이 치민다. 윙윙거리는 소리. 픽셀처럼 꼬이는 날벌레들.
60.
이번이 몇 번째인가? 낯선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고함친다.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우고, 그들이 수근거리는 자리로 데려간다.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침대맡에 놓인 스탠드 조명을 끄는 순간, 모두가 사라진다. 밤이 지속된다. 허공에 집어 던진 노트북의 CPU는 (물리적으로) 박살났다. 며칠째 시달리고 있는 환청은 CPU가 자기를 조각 모음하기 위한 헛된 시도일지도.
우리 집 주소가 적힌 초대 메일은 스팸으로 분류됐거나, 사실 누구에게도 도착한 적 없다. 다시 가운을 펄럭이며 다가온 의사, 그 돌팔이 새끼는 나에게 조현병 진단을 내렸지만, 안타깝게도 보호자 동의 없이 나를 무슨 병동에 감금하는 건 불법이다. 수심 어린 표정. 거실의 원목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나와 같이 살기로 한 선택을 원망하게 될 h는 내가 지껄이는 헛소리들, 약 기운에 절은 채 실시간으로 꾸며낸, 나로 수렴되는 온갖 추문과 음모의 타래를 밤새 들어줬다. 너도 알지? 그 년놈들이 얼마나 호사스러운지. 좆 같은 미술의 이름으로 말이야.
진짜 좆 같은 건 이번에도 죽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너보다 먼저 뒈질수도 있었는데.
61.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온종일 날씨가 흐렸고, 아무런 소식 없으니 사무치다.
62.
2023.09.09
신생공간 이후의 여기를 지배하는 건 감시자와 스파이다. 전자는 아무런 권한이 없음에도 제도를 감시하는 척하면서, ‘우리’에게 제도에 대한 불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감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속한 여기, 기금 인프라를 토대로 지어진 첨탑 아래는 시장주의가 무단으로 투기하다 버린 밑바닥이 아니라, 감시 체계를 재/구성하는 대안적 서사에 합류할 수 있다고 감시자에 의해 가치 판단된, 즉 미술 시장에 잠입하기 위한 스파이를 양성하는 소굴이다.
미술 주간의 막이 오르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뭐라고 떠벌리는 중이다. 그건 대체로 미래를 전망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를테면 미술계에서 각자 차지하고 있는 유/무형의 자리를 스스로 건사하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작가와 기획자 중에 누가 더 제 살을 깎아 먹는지 비교 대조할 뿐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프리즈 서울로 대변되는 “가능한 미래”를 환대할 수 있는 채비를 갖췄다. 각자의 고충은 바로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한 인터내셔널로 전환되면서, 비로소 망치와 끌을 거둔 채 VIP 신분으로 무슨 작업을 채굴하기 시작한다. 그것들 중에 무엇이 프리즈에 사로잡힌 국내 안팎의 미술계에 부합하는 실물 자산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 (참고로 암호 화폐는 우리가 다루기엔 아직 경제적으로 이르다.) 전망하기 위한 “대항 주체”로서 감시자의 레이더를 활성화한다. 물론 우리가 작업으로 쌓은 더미를 시장 차원에서 투기할 리는 없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주머니가 두둑하지 않으므로.
바로 이 순간 과열되고 있는 것은 무슨 공동체나 (컨템포러리가 먹어 치운) 버블의 조짐이 아니라, 그냥 도처에서 출처 모를 미술가들이 차려입은,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간지가 흐르는 욕망이다. 물론 파티를 위해 차려진 다이닝 코스는, 그것을 누가 실제로 누리는지와 별개로 즐겁다. 문제는 그런 뒤에 난장판이 된 자리를, 누군가는 무료 봉사에 가까운 고역으로 치운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만큼은 아무도 감시하면서 자축하지 않는다. 오늘도 학예 연구실에선 온갖 통계화된 자료들이 엑셀 파일로 휘날리고, 정장 차림의 비/정규직 도슨트가 우리 같은 관객을 미소로 환대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 주변에 프리즈 특집을 기획한 미술 잡지에 값싼 구독료를 치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나는 그들 중 하나로서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이제 파티는 끝났고, VIP들도 모두 떠났다. 그들 중 누구도 여기로 섣불리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여기 자체가 없을 테니까. 왠지 모르게 불길한 귀갓길이 무사하기를 바란다.
62.
마크 피셔는, 그가 주장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굴복한 것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불가피한 죽음이 (계급의 이름으로) 선언되는 순간을 돌이킬 수 없다. 이를테면 기념비에 가까운 무덤 주변을 우울한 표정으로 배회하는 사람들. 룸펜 지식인들. 마크 피셔의 사후에 발간된 선집에 정성스러운 글을 보탠 미국인 사이먼 레이놀즈도 그들과 한통속인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글은 끝나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인용하고 싶지 않다.
63.
에너지 드링크와 물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점심은 먹지 않았다. 요즘 식사를 자주 거른다. 오피스텔 7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좁은 복도를 가로지르다 기시감이 든다. 나는 약에 취해서 넋이 나가 있다. 여기가 무슨 모텔 건물이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복도를 따라 늘어선 문들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누를 것이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인기척이 없다. 다시 건물 속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다. 걸음마다 객실 문들에 걸린 체인이 헐거워진다. 나의 몸을 결박한, 간호사가 정성스럽게 묶은 매듭도. 그제야 사람들이 도망친다. 군중 속에서 발을 헛디딘다. 계단을 구르다 어김없이 심연 위로 자빠진다. 누군가의 발목을 낚아채자 질질 끌리는 옷자락. 나는 아직도 현실, 아니 여기에서 종종 기억을 엎지른다.
왜 너는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는가? 네가 사회적 질병을 개인화했기 때문에? 자문할수록 속이 뒤틀린다. 후기 자본주의는 없다. 우리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너는 잠자코 분신 자살하지 않았다. 혁명을 불사하지 않았고, 깃발 휘날리는 데모의 최전선으로 거슬러 전선 자체를 대변한 적이 없으며, 그냥 침대 위에서 브래지어를 풀고 나의 얼굴에 던질 뿐이다. 내 가슴 좀 봐. 제대로 보라고. 남자들이 이거 때문에 나랑 떡치려고 줄을 서던데. 나는 심드렁하게 박수친다. 우리도 떡칠래? 아니, 황송하지만 괜찮습니다. 남자는 노동자인가? 노동은 남자만이 무릅쓸 수 있는 운명인가? 너도 관료제 치하를 떠도는 정신병자라고 말해봐. 구조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만성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그게 너의 죽음이라고.
64.
지금도 죽고 있다고. 깨어나자, 나는 환풍기 아래서 수그린 채 담배를 피우는 중이다.
65.
수유동은 서울의 슬럼이다. 슬럼 아닌 곳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눈을 감고서도 거기를 짚을 수 있다. 삶의 질이 무슨 주식처럼 가파르게 오르내린다. 객관적인 통계는 필요 없다. 애초에 통계는 객관적이지 않다. 주변 사람들이 모든 걸 잃기 전에, 내가 우리 가족이 거기를 떠났다는 사실, 그로 인해 가족 단위의 공동체는 파산을 모면한다. 당분간 그럴 것이다. 내가 아파트 거실을 기웃거리는 동안 주변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에 관한 추문이 들려온다. 단호하게, 낮은 음질로 고함친다. 누가 역 주변의 오피스텔에서 자기 몸을 판다. 성매매를 하는 것이다. 아무도 포주가 누구인지 캐묻지 않는다. 그 새끼의 이름을 짐작하지만, 말로 꺼내고 싶지 않다. 포주가 없어도 성매매를 업으로 삼을 수 있다. 그게 가능하다고? 자기 몸을 자기가 파는 거야? 그렇다. 나는 한참 지나서야, 그 사실을 납득하게 된다.
왜 여자들, 창녀가 된 여자들만 거론되는가? 어느 자리에서든, 그들은 추문의 근원이다. 그들을 뒤에서 씹기 위해서 여기로 돌아 나온 것 같다. 속이 좋지 않다. 토하는 대신, 내 머리 위에 남은 맥주를 붓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포주 새끼를 좇기로 한다. 그건 쉬운 일이다. 어차피 연락처에 그 이름이 있으므로. 어디 몇 호로 오면 된다고 일러준다. 너는 어디에 있는데? 너도 거기 있어? 전화가 끊어진다. 맥주잔을 채우고, 다시 머리 위에 붓는다. 수입이 나쁘지 않다는 얘기, 아니 그 돈으로 무슨 차를 샀다는 얘기가 오가는 중이다. 몸값이 어떻고 저렇고. 남은 맥주를 바닥에 쏟는다. 포주가 없어도 된다. 그 새끼가 주식으로 파산한 이후에도 계속 몸을 사고파는 누군가가 있다. 어쩌다 그렇게 됐고, 솔직히 나는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뭐가 안타까운지 모르겠지만. 그게 전부인가? 창녀들이 접수하고 만 슬럼 얘기?
아파트 거실을 기웃거린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러다 유리 찬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발작한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왼쪽 뺨을 할퀴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모른다. 피가 질질 흐른다. 아빠가 다급하게 지혈하지만, 그 사실도 모른다. 이번이 몇 번째인가? 아직도 흉터가 남아 있다. 가늘게 패인 자국을 손으로 더듬는다. 이제 아침마다 뇌전증 약을 챙겨 먹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걸렀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오래전에 준비는 끝났다. 언젠가 정말 뒈지겠지. 아니면 차에 치여서 불구가 되거나. 나뿐만이 아니다. 수유역이나 그 주변에서, 모두가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 옆 테이블에 빈정거리다 서로의 머리채를 잡았다. 횡단보도에 쓰러진 사람들. 그들의 얼굴이 타이어에 갈리는 상상을 한다. 상상 속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구급차는 언제나 여기를 우회해서 저 너머로 사라진다. 아니면 역주행하거나.
그렇다. 나는 과장하고 있다. 확인한 적 없는 통계를 거스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창녀들이 접수한 슬럼에서 남자 새끼들이, 그들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군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술 냄새를 풍기면서 지들끼리 나누던 일화 속 장면이다. 처음으로 민증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가라오케에서 난투극 벌이는 것이다. 드랍 더 비트. 그러나 본인이 자초한 죽음과 폭력은 애도할 필요가 없나? 여기를 이대로 방치한 것은 누구인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사건 현장을 두른 펜스가 없고,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펜스도 없다. 우리는 그냥 여기서 놀고 있을 뿐이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고, 떡을 치면서 번식했을 뿐이다.
인프라의 부재. 그러나 ‘그것’조차 사건의 원인이 아니다. 애초에 그게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 손으로 만질 수는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스팔트 바닥을 뜯으면, 이 도시의 내장재가 드러난다. 상하수도 시설과 녹슨 파이프들, 복잡한 전선들이 엉켜 있다. 아니면 똥 무더기가 매장돼 있거나. 그 모습이 바로 인프라다. 나는 인프라의 부재가 아닌 ‘그것’을 가리킨다. 수상하지만, 다시 그 위를 아스팔트로 덮고, 신발 밑창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여기는 이제 대로변이라고 선언한다. 여기를 중심으로 골목들이 도처에서 굽이친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낯선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나를 부르면, 골목으로 향한다. 함께 범죄든 뭐든 저지르기 위해서.
66.
나의 권총을 숨긴 채, 나에게 권총이 있는 것처럼 거들먹댄다.
67.
새벽이 되자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모두가 흩어진다. 담배 꽁초가 시든 풀처럼 가로등 아래를 이리저리 구른다. 나는 한동안 거기 근처에도 발을 들이지 않는다. 외출을 삼가지만, 가끔 어딘가로 향하는 길에, 일부러 그 동네를 한참 우회한다. 물론 역주행은 하지 않는다.
인파에 휩쓸린 채, 오래전부터 나를 좀먹은 단상을 잊으려고 서두른다. 너와 동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곱씹으면서. 이동 경로는 뻔하다. 이태원이나 성수동, 뭔가 지루해지면 몇몇은 을지로로 향한다. 을지로에서 만나요. 만선 호프에서. 익명의 건물주가 주변 상가를 몰아낸 그곳에서. 서울 속 도심을 산책하는 게 가능한지, 애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각자의 걸음마다 아무런 지지체가 없는 바닥이 움푹 꺼지는 기분. “인프라의 부재.” 나와 매개된 점은 아파트 단지에서 벗어나, 여러 집들을 전전한다. 월세를 치르며 어딘가에, 낯선 동네의 후미진 건물 속에 처박힌다.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새 새벽이 가깝다. 다른 점들도 총성에 이끌리듯,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을지로는 아니다. 그 일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슨 아포칼립스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재개발될 처지에 놓인다. 2023년 하반기에 서울시가 발표한 무슨 계획안에 따르면, 도심 정비의 목적으로 몇 년 사이 개방형 녹지를 둘러싼 24층 규모의 업무 시설이 들어설 것이다. 누가 거기에 입주할지, 어쩌면 지금보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아케이드가 될지도. 얼마 전부터 동생이 살고 있는 유령 신도시처럼. 그곳에서 생계를 꾸린 세대 구성원은 말 그대로 손에 꼽는다. 하여튼 나는 그중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오늘도 신용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 온갖 어플들을 헤집고 다닐 뿐.
이제 점들은 지쳐 잠들었다. 아니, 나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액정 바깥에서, 액정의 표면을 따라 추측할 뿐이다. 팬데믹에 이르러 인구가 유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뭔가 가소롭게 느껴진다. 그렇다. 점은 일인칭이 아니다. 점은 주관적이지 않다. 누구에게도 섣불리 호소하지 않는다. 모두가 곯아서 떨어진 사이, 비트코인이 ‘유동 인구’라는 개념을 대체한다. 무슨 아케이드를 위한 억대의 투자금이 비밀리에 쌓이고 무너진다. 수유동 출신의 누군가, 나와 알고 지내던 미친 새끼 중 하나가, 그 잔해를 쓸어 담은 나머지 타워팰리스로 이사했다는 소식.
우리 주변에 무슨 일이 도사리고 있는지, 메타버스 속으로 숨어든 “없는 몸”은 지들끼리 축제를 벌이느라 자문할 겨를이 없다. 기타 리프가 울리고, 가상의 무대를 향해서 픽셀로 구현된 집기들을 마구 집어 던진다. 픽셀이 튀고 있다. 안타깝게도 나의 노트북 사양으로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냥 덜떨어진 사용자라서 그런 걸지도. 환기조차 성가시다. 어느 날 창문을 열자, 대로변에서 환호성이 들려온다. 자가 격리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전하는 안부. 밀레니엄처럼 느껴지는 새로운 서막. 나는 방진용 마스크를 종량제 봉투에 쓸어 담고선 이태원으로 향한다. 그렇게 다시 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불의의 사고가 닥친다.
68.
후드 모자를 벗고, 이미 꽃들로 무성해진 자리에 헌화한다. 짧은 묵념의 시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지나쳐, 시청 광장으로 되돌아온다. 누군가가 나에게 묻기를, 어떤 심정으로 여기에 왔는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나? 뭐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최대한 유려하게 말을 꾸민다. 아니, 목구멍 속에서 울컥거린다. 어느새 카메라 몇 대가 그런 나를 찍고 있다.
영상은 TV 조선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길고 쓸데없는 문장은 편집으로 조각났다.
“좀 더 명시적으로 애도의 시간을 갖고.”
명시적으로. 나는 광장 주변에 엉거주춤 선다. 진상을 규명하라는 구호를 따라 외친다. 우리에겐 진상이 필요하다. 그렇다. 진상이 필요하다.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인파가 무너져 내린다. 내가 잠든 사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던 채팅방은 뒤늦게나마 나를 추스른다.
해밀턴 호텔 쪽에 가본 적은 없다. 우리는 주말마다 이태원 소방서 앞에서 만났다. 우사단로에 들어서자마자, 대로의 왼편으로 기운다. 담배를 피우면서 어슬렁대다 네온사인이 들지 않는 건물에 오르고, 무슨 노래방 입구를 지나 몇 층 더 오르면, 가드가 습관처럼 신분증을 검사한다. 스마트폰에 플래시 방지 스티커를 붙인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니 다음 날에도 떼지 않는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스티커의 존재를 까먹었다. 술을 마신다. 오늘은 무슨 믹스 셋인지 궁금하지 않다.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한다. 아직도 춤추는 게 좀 어색하다.
남자를 뒤에서 감은 적은 없다. 누군가가 나를 감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드물다. 나에게 지금의 교착 상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초보”이므로. 물론 꼴리는지 아닌지 알아채는 건 중요하다. 나보다 눈치 빠른 남자들이 서로 애무한다. 환희가 이끄는 대로 섹스한다. 이태원 아닌 곳에서도. 데이팅 어플로 수소문한 프로필이 나의 집과 침대 위를 들락거린다. 나는 아직까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섹스가 끝나면, 어색하게 굳어버린 채, 여기서 사라진다. 그 모습을 좇아 네온사인 아래로 쏟아져 나온다. 몇 개의 거점들, 어느새 익숙해진 거리를 배회하면서 또 술을 마신다. 이번엔 샷으로. 성적으로 무작정 감응한 적은 없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건너서 아는 사람들,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과 악수하고 근황 같은 걸 나눈다. 유려하지 않게. 무슨 우정이나 소속감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그냥 서로의 존재를 가늠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이르러, 호모 소셜에서 안도한다. 남자들과 치이면서, 저 혼자 무력하게 벌벌 떨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사로잡힌다. 밤이 지속된다. 그 순간은 각별하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조차 없지만. 플래시 방지 같은 건 소용이 없는데도.
이태원 구석구석에 전시 포스터를 붙인 적이 있다. 퀴어에 대한 전시였고, 누군가와 공동 기획했다. 이제야 퀴어라는 말을 쓰고 보니 어감이 생소하다. 게이는 어떤가? 바이섹슈얼 퀴어는? 그 이후에도 정체성을 가리키는 온갖 단어들을 따라 읊거나 멋대로 조합할 수 있지만, 그건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 같다. 복잡한 생각 없이, 차근차근 포스터를 오려 붙인다. 전단지로 어수선한 펜스 위에. 게이 클럽과 술집 입구에. 화장실 칸막이의 시선 높이에. 그 전에 무슨 전시인지, 사장님에게 브리핑한다. 여기서 굳이 미술하는 사람 행세하는 건 성가신 일이다.
하나의 필드를 상상하고, 거기에 남자들을 몰아넣는다. 그들은 유니폼을 입거나 벗은 채 축구를 한다. 그 모습을 본다. 내 옆에는 나처럼 소외된 누군가가 각자의 시선으로 필드와 그 속에서 제멋대로 구르는 몸짓, 박력에 차서 부딪히고 엉키는 무슨 덩어리를 훑는다. 이 전시는 시선에 관한 것이다. 남자를 대상화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여기 자리를 섣불리 박차지 않은 채, 여기서 은밀하게 매혹되는 중이다. 남자와 더불어. 그게 내가 추린 브리핑의 골자였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참사 이후에도 우리는 종종 소방서 앞을 약속 장소로 삼았다.
69.
사이먼 레이놀즈의 문장을 빌리자면, 이 그리움은 외로움이다.
70.
계급과 젠더, 섹슈얼리티. 그 사이에서 나를 규명할 수 없다. 무슨 암기장에 눌러 적은 것 같은 (개념적인) 단어들이 헷갈린다. 아니, 단어 자체가 아니라, 단어를 둘러싼 사변으로 어수선하고, 금세 난장판이 된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교실에 들어서면 저 혼자 속이 뒤틀린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멈춘다. 어떤 책 구절에도 섣불리 밑줄 치지 않는다.
71.
투쟁할 필요가 없다. 민중은 나에게 너무 추상적이다. 그래서 ‘그것’을 대상화한다. 무슨 이미지로. 너의 (이름이 아닌) 얼굴을 부르는 초상으로. 너의 얼굴은 어디에나 있다. 이를테면 포르노와 불법 촬영물, 둘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는 딥 페이크, 성적인 모욕과 수치심에 사로잡힌 일상 속 창녀들의 소각장에. 너의 얼굴이 화면 위로 팝업처럼 드러나는 순간, 나는 ‘그것’이 어떤 알레고리도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것’은 익명의 계정을 유혹하기 위한, 매일 같이 환희에 찬 얼굴일 뿐이다. 악몽 속에서 현전하는 얼굴. 그러나 착취자는 밤새 악몽을 꾸지 않고, 공포나 애도를 무릅쓰지 않으며, 그냥 욕망이 소진된 상태로 너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은 너를 “없는 몸”을 갖춘, 정치적으로 폐기 처분된 마네킹처럼 대한다. 몸 자체가 없으므로 현실에서 추방되거나, 온갖 추문과 가십으로 떠돌면서, 가까스로 존재한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를 대속하는 자로서 민중의 역사를 거슬러도, 너에게 헌사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록은 없을 것이다. 너는 대문자 역사 바깥에서 소외됐다. 그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 네가 스스로 남긴 기록이 있을까? 어느 시점부터 갱신되지 않는, 무슨 계정의 피드가 증언하는 것은 무엇인가? 너의 얼굴이 필터로 보정된 채, 다소 투박한 질감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기억 속 공포로 어수선한 낯선 얼굴과 대립하기 위한 적으로서. ‘그것’이 악몽을 초래하면, 나는 기꺼이 순응한다. 혹은 ‘그것’을 다시 악몽 속에 내치기 위해 서두른다.
72.
그렇다. 너는 허구를 위한 소실점이다.
73.
2009년 옥인 아파트는 철거될 위기에 놓인다. 그리고 옥인 컬렉티브는, 아직 미술이 아닌 채로 그곳에 헤쳐 모인다. 농성하는 대신, 세입자와 더불어 주변 사람들을 초대하고,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사사로운 회담을 연다. 일시적으로 연대, 아니 그들만의 모자란 펜스를 두르고, 그 안에서 지속한다. 나는 아직 주변인이 아니므로, 언제나 그렇듯이 그곳에 없다. 유튜브의 무슨 채널을 켜고, 철거 용역이 온갖 집기를 던지고 부수는 모습, 유리 파편이 튀는 난폭한 현장을 더듬거리며 감상할 뿐이다. 나의 아파트 속에서. 미술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 채로.
몇 년이 지나서야 옥인 아파트가 존재하지 않는 서울 근교에서, ‘옥인’의 초대를 받아 주변 친구들과 함께 퍼포머로 참여하게 된다. 가이드 영상을 보면서 체조의 동작을 제멋대로 연습한다. 기술적으로 숙련되기 전에, 무슨 미술관 전시장을 떠돌다 체조를 반복한다. ‘옥인’은 우리에게 말했다. 동작이 헷갈려도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덕분에 긴장되지 않았다. 기억은 그즈음에서 멈춘다. 다시 통조림처럼 절여진다. 나는 그때의 체조를 재현할 수 없다. 나의 몸은 기억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지 않았다. 아마 ‘옥인’도 내가 체조의 재현,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으로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근심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들은 무언가 요구하기를 정중하게 삼갔다. 투쟁이고 뭐고 다 빈정거리고 싶었던 나에게도.
‘옥인’은 도시의 생태계를 순환시키기 위한 게릴라 작전이 아니다. 그들이 ‘옥인’으로 점유한 각기 다른 거점들은 대체로 거대 자본의 폭력 앞에서 무력하지만, 그 사실에 대처하고자 힘을 불리거나 되찾을 필요는 없다. 체조는 저항 내지는 투쟁을 무릅쓰기 위한 몸짓이었나?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다시 속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그에 화답하듯 제도의 문제를 심문할 것이다. 제도는 부조리하다. 여러모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술관처럼 불어난 제도 속에서 체조한다. 체조를 반복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복 자체다. 계속 되풀이하지만, 기술적으로 숙련되지 않는 서툰 몸들. 아니, 존재들. 미대를 갓 졸업한 나와 친구들은 그중 하나로서 ‘옥인’에게 스스럼없이 화답했고, 이제야 2009년을 회상하고 있다.
74.
그들, 아니 ‘옥인’의 멤버였던 누군가에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받았다.
“내부가 차가운 음식을 담는 상자.”
나는 그것으로 연상한 물건들의 목록을 정리해서 회신했다. 그 내용을 스코어처럼 다듬어 만든 영상 작업이 또 다른 미술관에서 상연되는 모습을 기웃거렸다. 미술 비평가로서. 우리가 주고 받은 메일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메일 속에 실린,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물건들과 함께. 밤새 클라우드를 뒤져도 흔적조차 없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매 순간에 대한 기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