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에필로그
내가 혼자서 돌이키고 싶었지만, 끝내 그러기를 실패한 기억들. 무슨 단상이 치밀 때마다, 사실 ‘그것’은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은 채, 단조로운 일상, 나날이 숨통을 조이면서 여기로 수렴되는, 아니, 여기를 에두르는 견고한 펜스, 주변의 유리 창문을 두드리는 환청, 아니 수신호로 반복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단상에 관해 부연할수록, ‘그것’이 저절로, 때로는 난폭하게 자라나, 여기 아닌 곳에서 휘몰아치고, 나는 그 모습을 여기서 보거나 들으며, 조금 더 구체적인 언어로 가다듬었다. 이건 나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나로부터 시작했으나, 결국 기억을 풀어헤치는 손길은, 저기 창문 너머에 가닿기 위한 제스처, 저기서 수군거리는 누군가, 타자의 형상을 불러 세우기 위해 다시 분주해진다. 자판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돈다. 나의 언어만으로 길들일 수 없는 존재, 나는 그 사람을 타자라고 부르지만,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누구 것인지 갈수록 모호해지는 언어가, 또 다른 단상으로 가지를 칠 뿐이다. 계속 나고 자란다.
나는 이제 막 시작된 이야기가, 여기로 잦아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몸부림쳐도 나 혼자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여기의 일상은 단조롭고, 무가치하고, 정치적이기 때문에 부조리한, 우리가 서로를 모르는 사이 불어난 절망의 부채, 혹은 부채로 말미암은 절망, 연이은 파산 신고에 미치지 못하지만, 아직 세상은 여기와 더불어 멸망하지 않았고, 시간은 어떻게든, 아니 어디로든 흐르며, 무수한 ‘나’들은 불가피하게 어디선가 마주치고, 그 순간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다채로울 것이다. 그렇다. 나는 기억으로 변질되는 서사가 마치 우리를 이 좆 같은 세상에서 건져내기 위한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누군가와 함께 머물기 위한 장소가 서사 속에서, 그냥 서사에 그치기 때문에, 나와 마찬가지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래된 경구와 다르게, 여기는 가까이 보면 비극, 여기서 멀어질수록 비극으로 얽혀든 인간 군상, 혹은 ‘그들’이 서로를 혐오하고, 착취하기 위해 머무는 무슨 진영이 드러날 뿐인데? 잘 모르겠다. 아니, 내가 전지적인 독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안도할 뿐이다.
자기가 펼쳐놓은 세상을 굽어보다, 그 위로 무수한 ‘나’들을 쏟아버리고, 제각기 있어야 할 위치를 점지하거나, 자신의 진영으로 묶는 것, 덕분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동일시의 감각, 공동체로 거듭나는 연대기적 서사, 그 속으로 인용될 때마다, 나로부터 시작한 얘기, 아직 서사로 완결되지 않은 그 무수한 단상들은 여기서 사라지기를 원한다. 아니, 사라질 것이다. 내가 돌이킬 수 있는 건, 그런 식으로 비평이 미술, 아니 미술과 더불어 존재할 뿐인 나의 존재를 합리화할 수 있다는, 자기 부정에 가까운 비평가로서의 오해다. 비평가는 전지적이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독자, 아니 관객으로서 ‘나’를 둘러싼, 저 너머에 도사린 불가해한 작업들, 그럼에도 자신의 쓸모, 아니 쓸모없는 상태를 무방비하게 노출하고 있는 대상에게, 조금 더 집요하게 이끌린다. 내가 타자를 부르기 위해, 아니 그 전부터 혼자서 소스라치는 것처럼. 너의 이름이 ‘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타자의 이름으로 기억 속을 헤집고,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함께 나누기를 주저했던 여백을, 네가 아닌 누군가와 더불어 풀어쓴 것처럼.
미술에 관한 글들을 그르치는 사이, 내가 여기서 헤아리지 못한 작업이 무성하고, 가끔 그 속으로 잦아들 때마다, 왠지 모르게 눈이 부시지만, 나는 결국 어딘가로 이끌릴 것이다. “여기에 없는 것의 부재”를 찾아서. 혹은 ‘그것’이 여전히 미술일 수 있다면. 찬란하지 않다. 너무 비좁고 외진 구석에 자리하거나, 이대로 조명 아래서 녹아버릴 필요도 없다. 그렇다. 이건 나에 관한 얘기가 아니고, 여기에서 저기로 도망치기 위한 혼자만의 구실도 아니며, 나와 더불어 풀어쓸 수 있는 여백, 도심 속 성가신 소음과 단상들, 무심코 흥얼거린 멜로디, 불확실한 전조, 누군가와 마주치기 위해 서두르는 걸음, 기다림, 침묵의 고요, 저 혼자 알아챈 ‘나’의 기척, 낯설고 이상한 존재들, 존재가 아닌 것, 여기가 아닌 곳에서 ‘나’를 부르고, 그 부름에 화답하듯 우리가 무수하게 부서지는 순간, 그 사람은 내일을 기약하고, 금세 저버리고, 우리의 기억 속을 헤집는 손길, 아니 언어는 누구 것인가, 나는 숨을 고른 뒤, 여기를 조용히 박차지만, 다시 여기로 되돌아올 것을 알고 있고, 여백은 무한대로 벌어지고, 다시 스크롤, 비문처럼 쓰고 말하는 사람들, 아니, 타자는 비문일 뿐이다. 그 사실을 기억해, 다시 만날 때까지.